실학사상에 나타난 고대사 인식
- 최초 등록일
- 2015.04.17
- 최종 저작일
- 2014.09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목차
1. 머리말
2. 실학의 고대사 인식 태도
3. 실학의 고대사 인식에 대한 한계와 극복
4. 맺음말
5. 참고문헌
본문내용
조선 후기는 국내외의 상황 변화에 따라 역사인식 및 서술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양난(兩難)을 계기로 조선 사회는 급변했으며 이는 사학사(史學史)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때 역사서술은 실학자(實學者)들이 주도했다. 그들의 역사연구는 사회・경제개혁안 못지않게 시대를 앞서가는 면모와 근대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선학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실학자들은 한국고대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정통론에 입각하여 고대사를 주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에 따라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새롭게 규명되었다. 신라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고구려, 발해에 관심을 보였고, 우리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에도 주목했다.
<중 략>
여기에서 조선 후기 역사학자들의 역사영역에 대한 인식이 주목된다. 이종휘처럼 혈통주의의 입장에 서서 같은 혈통을 가진 종족집단의 활동무대를 모두 우리의 역사영역으로 보는 입장과 다산처럼 당시의 현실 강역 범위 안에 드는 지역만을 역사영역으로 보는 입장으로 나눠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조선과 고구려, 부여, 발해의 활동무대인 만주지역을 우리 역사영역 안에 포함시키느냐, 제외하느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리고 한사군의 역사에 대해 우리 역사로 보느냐, 중국사로 보느냐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역사영역은 조선 후기에 특히 발전한 역사지리 연구의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와 직결되므로 역사서술에 앞서 그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중 략>
조선 전기 이래 유학자들로부터 좋지 않게 인식되어 왔던 백제는 실학자들로부터도 그다지 우호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기자와 마한을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 서있으므로 백제가 정통국가인 마한을 멸망시킨 것에 대해 대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한이 국토의 일부를 백제에 할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무력으로 멸망시켰으므로 위만이 기자조선을 빼앗은 것과 흡사하고 왕망이 한을 찬탈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참고 자료
김현숙,「실학자들의 고구려사・백제사 연구」『한국고대사연구』62, 2011.
이기백,「順菴 安鼎福의 合理主義的 史實 考證」『韓國實學硏究』1, 1999.
李萬烈,「十七・八世紀의 史書와 古代史認識」『韓國史硏究』10, 1974.
,「朝鮮後期의 高句麗史 硏究」『東方學志』43, 1984.
정구복,「조선 후기 사학사의 성격」『韓國史學史學報』15, 2007.
정구복,「한백겸의 사학과 그 영향」『진단학보』63, 1987.
趙誠乙,「『我邦疆域考』에 나타난 丁若鏞의 歷史認識」『奎章閣』15, 1992.
,「제4부 實學의 華夷觀」『조선후기 사학사연구』, 한울아카데미, 2004.
조인성,「실학자들의 한국고대사 연구의 의의」『한국고대사연구』62, 2011.
韓永愚,「19세기초 丁若鏞의 歷史觀과 對外觀」『朝鮮後期史學史硏究』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