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기말대비 요약정리
- 최초 등록일
- 2015.02.10
- 최종 저작일
- 2014.04
- 1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없음
본문내용
◉항일 전쟁의 끝~ 중화민국 헌법 제정까지 중국 내부 정치상황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중국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더 이상 일치단결, 즉 독재에 대한 명분이 사라졌으며 이에 따라 중국 내에는 다양한 세력 간의 항쟁이 싹을 틔웠다. 공산당은 일본군 항복을 기회로 세력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옌안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각지에서 적극적 활동을 실시하였고, 국민정부 또한 공산당의 움직임을 경계하여 각지의 군대에게 중앙정부의 지시를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국민들은 전쟁 전보다 더 나은 사회 경제 번영을 기대했으며 특히 정치적으로도 국민당의 독재를 끝내고 민주적 헌정의 시대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전쟁은 사양한다는 내전에 대한 거부감이 커졌으며 1945년 11월 각계반내전연합회가 생기는 등, 나라 안팎의 여론과 정치 세력 대다수가 평화적으로 전후 중국의 진로를 결정하기를 기대했다. 이에 국민당도 전후 민주적 헌정을 실시하기로 공약을 내걸고 공산당도 이에 동조하여 우선은 평화적 방법으로 서로 경쟁을 실시한다.
국민당은 1945년 5월 국민당 제 6회 전국대회에서 헌정 실시 후에도 국민대회를 통해 국민당의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하였고 공산당 역시 4~6월 공산당 7회 전국대회를 통해 연합정부 구상을 제기하며 국민당의 주도권을 견제하였다. 이에 1945년 8월~10월 국공 양당 회담을 거쳐 장개석과 모택동은 정상회담 끝에 쌍십회담기요를 10월 10일 공표하게 된다. 이는 비록 국민당이 우위에 있었으나 공산당의 주장도 수용되어 당파간의 협의의 장이 마련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1946년 1월 정치협상회의로 인해 국민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부위원 중 국민당원의 수를 반으로 제한하게 되며 국민당의 주도권은 제약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이후 정권의 수립에서 국민당의 주도권을 제약한 상태에서 국공 양당 중심으로 민주동맹계열까지 참가하는 연립 정권의 수립을 이루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