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극장'과 4.19 혁명
- 최초 등록일
- 2015.01.01
- 최종 저작일
- 20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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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4.19 혁명을 소재로 쓴 소설 "무너진 극장"과 4.19 혁명을 엮어 정리한 내용입니다.
목차
1. 4·19 혁명의 배경
2. 4·19 혁명의 전개
3. 4·19 혁명의 결과와 의의
4. <무너진 극장>과 4·19 혁명
본문내용
4·19 혁명의 배경
당시 자유당과 민주당이 여야로서 정치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두 정당은 분단의 논리를 수용하고 있었지만 자유당은 통일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자유당이 말하는 통일은 북진 통일을 의미했다. 이 주장은 현실정책에 있어서는 통일을 위한 반공이란 논리로 둔갑하게 되었다. 그리고 반공의 논리는 자유당의 정권안보를 위해 자의적으로 이용되었다. 일반 민중들은 3년간의 내전을 겪으면서 이데올로기로 인해 생긴 막대한 희생에 대한 피해의식과 전쟁에 대한 공포로 정부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사실 자유당의 반공논리의 가장 큰 피해자가 일반 민중들이기도 했다. 반공을 위한 막대한 군사비를 부담하는 것도, 반공정권을 지탱하기 위한 갖가지 소비재 원조를 하는 것도, 반공 때문에 기본권을 제약당하는 것도 민중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이승만정권이 추진했던 의무교육을 통해 대부분의 민중들이 기본 교육을 받게 되었고 이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반공 논리에 대해 의심과 비판을 낳게 되었다.
1957년에 들어서 미국원조의 감소와 유상의 공공차관으로의 전환 및 그에 따른 한국경제의 불황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민중들의 정치적 불만과 경제적 어려움을 반공논리를 동원한 억압과 해마다 증액되는 원조 및 그에 따른 외견적 경제성장으로 무마하던 자유당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상황은 그들을 지탱하던 한 축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았고,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의 독재정치에의 열망도 민중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정부가 부산에 피난하였을 때도 집권을 연장하기 위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급급했다. 헌병대를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개헌안을 ‘사사오입’의 억지로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기는 하였으나 부통령은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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