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사회』를 읽고...
- 최초 등록일
- 2014.12.09
- 최종 저작일
- 2010.04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제 1장 장원
1.영주의 토지
2.장원의 확대
3.영주와 토지보유농
제2장 예속과 자유
1.출발점-프랑크시대의 신분
2.프랑스의 농노제
3.독일의 경우
4.잉글랜드의 경우-예농제의 성쇠
제 3장 새로운 형태의 장원제를 향하여
1. 의무부담의 고정화
2.인적 관계의 변형
본문내용
장원에서는 경제적 측면이 제 1차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거기서는 수장의 권력은 맨 처음부터 토지 생산물의 일부를 거두어냄에 의해 스스로 소득을 확보하는 일을, 비록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주요한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원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토지’였을 뿐 아니라 사람이 사는, 종속민이 사는 토지였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해서 테두리가 정해진 이 땅덩이는 이것대로 다시 밀접한 상호의존성에 의해 통합되어 있는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그 한 부분은 ‘영주직영지’로서 역사가에 따라서는 ‘영주보유지’라고도 부르는 땅이며 영주는 이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모두 직접 거두어들였다. 다른 하나는 농민의 중소경영지, 즉 ‘농민보유지’였다.
<중 략>
동일한 지역에서 근접한 시기에 이루어진 영주의 ‘지조대장’ 둘을 놓고 비교해볼 때 둘 다 비슷한 기준을 이용한 경우는 단 한번도 찾아볼 수 없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그용어만 보더라도 실제로 그 속에는 하나의 본원적인 대립이 나타나고 있었다. 즉, 한쪽에는 자유민들이, 다른 쪽에는 노예들이 있었다.
여전히 노예는 법률적으로 주인의 物이었으며 주인은 노예의 육체와 노동, 그리고 재산을 아무 제약 없이 처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는 독자적인 인격을 박탈당한 존재로서 인민의 테두리 밖에 위치하면서 태어나면서부터의 이방인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 략>
영주에 대한 종속민의 관계를 12세기부터 변형시키기 시작했던 심층적인 변화는 몇 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카롤링왕조시대에 작성된 지조장부가 실제적으로 적용하기 불가능하게 되고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면서부터 이제 장원 내부에서의 생활을 규제하는 것이라고는 순전히 구전되어 온 규칙들밖에 없게 될 위험이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카롤링시대의 것과 유사한 본보기에 바탕을 두고, 그 당시의 여러 조건에 보다 적합한 재산과 권리의 상태를 확정짓고자 할 때 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