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14.11.30
- 최종 저작일
- 20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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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고대, 그리스·로마 목욕탕
2. 중세 초, 목욕 문화
3. 로마의 목욕 문화를 계승한 하맘(Hammam)
4. 중세 말, 죽음의 목욕
5. 목욕의 부활
본문내용
1. 고대, 그리스·로마 목욕탕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에게 공중목욕탕은 휴식, 화합, 사교의 장이었다.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로마의 카라칼라 목욕탕은 이러한 목욕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었다. “목욕탕, 여자, 포도주가 있어야 그것이 진정한 삶이다!” 라는 말이 존재할 만큼 공중목욕탕은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공중목욕탕은 절도, 술주정, 불미스러운 성행위와 같은 이중적인 모습 또한 가지고 있었다. 공중목욕탕 옆에는 매음굴이 존재하였으며 온수, 나체, 기분 전환은 섹스와 연결되었다. 즉, 목욕탕과 성행위의 노골적인 결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지체 높은 남녀는 목욕탕의 시중꾼들에게 각종 마사지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기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음부마사지’였다. 로마 초기만 해도 풍기를 중시하여 남녀가 따로 입욕하였으나, 말기에 이르자 남녀 혼탕이 일반화되었다. 목욕탕은 음탕한 장소로 변질되어갔다. 결국 목욕탕의 쇠락은 로마 제국의 쇠락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목욕, 그 자체가 로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로마 목욕 문화를 계승한 사람은 게르만인도 기독교인도 아닌, 이슬람이었다.
2. 중세 초, 목욕 문화
중세 초기에 목욕 문화는 로마 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하였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몸을 다 드러내 놓고 씻는 행위는 유혹을 일으키기 때문에 죄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외에도 정치적·경제적 문제로 민중들이 목욕을 즐기던 대형 공중목욕탕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그 수는 점차 줄었다. 대신 주교, 교황, 황제 등은 자신의 거주지에 화려한 목욕탕을 끊임없이 세우고 규모를 늘렸다. 이렇게 목욕탕은 만인을 위한 시설에서 특권층만의 공간으로 바뀌었으며 점점 더 쾌락의 공간으로 변모해갔다.
최초의 기독교인인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목욕을 중시했다. 다만 이들의 목욕은 육체적인 청결보다는 관례적인 청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시체와의 접촉, 간통, 살인, 동성애 등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정화 용도로 몸을 씻곤 했던 것이다.
반면 기독교는 타종교(특히, 유대교)에 비해 청결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청결관을 보자면 예수는 청결에 무관심하였다.
참고 자료
캐서린 애셴버그,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예지, 2010년 11월 08일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송일준 기획, MBC, 2011년 10월 02일
다큐 프라임 - 은밀한 문명사 목욕』, EBS, 2013년 09월 17일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alsn76/40202640627
김동원 교수님 PPT 중세의 목욕 죽음의 목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