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전후 수군세력
- 최초 등록일
- 2014.09.25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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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머리말
Ⅱ.임진왜란 전 수군세력
Ⅲ.임진왜란 후 수군의 변화
1.임진왜란 직후
2.조선말기
Ⅳ.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한국은 일찍부터 상당수의 수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군은 바다나 하천 또는 그 연안 등의 작전 지역에서 무력을 통하여 유리한 지위를 획득하며 적국의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상대의 전쟁의지에 영향을 주는 군대이다.
우리나라의 수군(水軍)은 고구려 때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고, 고려 말에 이르면 수군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고려 말까지 수군은 육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다가 조선전기에 이르면 육군과 구별된 새로운 병종으로 확립된다. 이러한 조선전기 수군의 발전은 고려 말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수군이 재정비되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지방군의 편성과 운영은 각 지역별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진관체제였다.
<중 략>
조선시대의 수군의 구분은 왜란을 중심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조선은 건국 이후 대외정책의 사태를 명의 신국으로 사대지례하는 명목 하에 조공을 하였다. 명은 조선에게 자치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조선에게 동해의 번병(藩屛)으로써의 역할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중국 해안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의 방어에 번병의 역할이었던 조선의 책임이었다. 명 태조는 삼차에 걸쳐 일본의 조공과 중국연안의 노략질하는 왜구의 억제를 일본에 요구 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명은 만여 척의 군선을 동원하여 일본을 정벌하겠다는 뜻을 조선에 전하였다.
<중 략>
고종의 즉위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국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있었다. 대원군이 집권한 고종 즉위년(1863)에는 외적으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비롯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위협이 증대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또한 내적으로는 19세기 초부터 권력을 독점해오던 세도정권은 페해를 해결하고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시기였다.
대원군의 집정 이래 연이어 발생한 이양선의 침략은 대원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조선의 대응은 이들의 침력을 천주교와 야합한 외세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위정척사를 내세워 더욱 강력한 쇄국으로 대응했다. 그리하여 신분타파와 균형된 인재 등용, 집단이기주의로 뭉친 서원 철폐, 무관의 권위 회복과 군사력 강화 등 개혁을 단행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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