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벌귀족의 형성과 본관제
- 최초 등록일
- 2014.09.25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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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문벌귀족의 형성
3. 본관제의 성립
4. 본관제를 통한 향촌지배
5. 문벌귀족사회의 쇠퇴
6.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금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성씨(姓氏)는 고려 초기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우리는 흔히 문벌귀족들의 시대라 일컫고 있다. 후삼국의 쟁패 속에 지방의 토착세력인 호족세력은 각 지역에서 발흥한 강호세력이었던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에 흡수되어고, 이는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고려로 다시 한번 편입되었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 이후 강력한 호족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혼인정책 등 다양한 포섭책을 실시하였고, 호족세력은 중앙관료화 하여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마르크 블로크 (Marc Bloch)는 『봉건사회』에서 귀족을 정의하면서 “첫째는 귀족이 갖추고 있다고 자처하는 우월성을 실제로 확인해주고 구체화시켜주는 고유의 법적 신분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고, 그 둘째는 이 법적 신분이 혈통에 의해 영속화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 략>
고려의 개창 이후 개국에 공이 있는 세력을 개국공신이라 부르며 특권집단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약한 왕권에 도전하게되었고, 광종때 이허한 공신집단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게 된다.
고려 광종 이후 고려사회의 지배층은 큰 변동을 맞는다. 왕위계승까지 좌우해왔던 호족들이 대거 숙청당하면서 호족은 고려 지배층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광종은 호족세력의 숙청과 함께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과거제를 실시하게 되고 과거제의 시행은 고려의 권력 중심이 호족에서 신라의 6두품 출신계열로 넘어가는 계기를 제공한다. 과거를 통한 지식인들의 정계진출은 고려를 관료적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게 하였으며, 이들 또한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형성되어갔다.
<중 략>
중세적 특징 속에서 고려사회 역시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를 기반으로 사회경제 형태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정착성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고려시대는 호적이 작성된 본관을 축으로 지방사회가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본관제에 따른 향촌생활과 백성의 본관지 정주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다. 이틀을 무너트리는 백성의 이동은 국가차원에서 엄격한 제한의 대상이 되었고, 유랑이 인정되는 조직은 백성으로 편입시키지 않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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