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읽기 ②> 영조의 ‘양위(讓位) 소동’과 ‘탕평정치(蕩平政治)’
- 최초 등록일
- 2014.08.29
- 최종 저작일
- 20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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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노론 당적의 왕세제(王世弟), 연잉군
2. “이복 형(경종)을 독살했다”는 비난 속에 왕위에 오르다!
3. 그치지 않은 경종 독살 비난, 이인좌의 난과 탕평정국
4. 당쟁을 막으려고 양위 선언을 하다 - “나를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무엇 하겠는가?”
5. 좌절당한 탕평 세상과 다가오는 비극
본문내용
● 노론 당적의 왕세제(王世弟), 연잉군
조선사에는 임금의 아들이 아닌 아우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어서 보위(寶位)에 오른 경우가 두 차례 있었다. 정종의 아우였던 태종과 경종의 아우였던 영조가 그들이다. 물론 제13대 명종 또한 인종의 이복 아우였다. 그러나 명종은 인종 생존 시 왕세제로 책봉되지는 않았다.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후사(後嗣)를 두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고, 또한 문정왕후(인종의 계모이자 명종의 친모)가 서슬 퍼렇게 왕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명종에게 보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조선이 부자승계를 원칙으로 왕조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분명 이러한 상황들은 모두 예외적일 뿐 아니라 비정상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명종 또한 이복 형 인종처럼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 명종의 비(妃) 인순왕후 심씨는 임금의 유언과 종친의 천거에 따라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여서 보위에 오르도록 했다. 그가 바로 선조 임금이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선조의 친아버지인 덕흥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즉 명종과 덕흥군은 이복형제 사이였고, 선조는 명종의 조카였던 셈이다. 조카를 양자로 삼아서 대(代)를 이은 것이다. 이렇듯 당시는 형제상속이 아닌 -양자를 받아 들여서라도- 부자상속이 엄격히 지켜야 할 법도였고 또 당연한 상식이었다.
<중 략>
여하튼 영조가 어떻게 행동할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신하들 앞에 때마침 대비의 수찰(手札)이 도착했다. 대비의 수찰(手札)이 도착했다는 것은 영조가 양위의 명을 거둘 수 있는 명분이 생겼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일단 안심했다. 더 이상의 혼란과 파국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선위할 뜻을 거두라는 대비의 명에 영조는 못이기는 척 ‘임금의 짐을 벗겠다’는 명을 거두었고, 이에 신하들은 천세(千歲) 삼창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당시 그 자리에서 “이후 어찌 차마 당론(黨論)을 하겠습니까?”라는 신하들의 약속은 결코 지켜지지 않았고 지켜질 수도 없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