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책사 한명회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4.07.10
- 최종 저작일
- 20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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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명회와 세조
2. 한명회와 제찰사제
3. 한명회와 덕종(德宗) 추숭
본문내용
한명회는 세조의 책사이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영민한 자질을 이어받아 유교 경전과 사서에 능통했고 무술을 좋아하여 병학, 역산, 음률, 의약, 복서에 이르기까지 널리 능통했다. 하지만 세력이 부족하여 아직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주변인에 불과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유능한 인재가 더 많이 필요했다. 천하의 책사 한명회가 이점을 꿰뚫어보고 권람을 통해 수양대권의 숨겨둔 의기를 불러내자 정변의 싹이 움튼 것이다. 한명회라는 인물이 수양대군 수하로 들어가면서 당시 권력의 균형을 이루던 정치적 평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한명회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문이 깊지 못해 몇 번이나 과거에 떨어졌고 관직이라고는 38세 되던 1452년 문음(음서)을 통해 그나마 종9품의 말단직, 경복궁 문지기를 맡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학문의 깊이에 비해 그는 모략과 사람을 보는 눈, 정치적 전술전략이 매우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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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2년 한명회가 선위사로 파견됨으로써 지방 수령과 향리 등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행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파악하였다. 한명회는 이때를 계기로 세조 직위 전 시기동안 거의 매년 지방에 파견되어 주로 북방 방비와 같은 구방, 군사적 임무에 주력하였다. 한명회 체찰사 활동은 국가의 전역에 걸쳐 국방 백성위무 지방민 감찰, 진휼, 제언 축조 등 국정의 다방면에서 장기간 계속되었다. 특히 한명회의 경우처럼 국방 4도를 아울러 체찰하였던 것이나 거의 1년 가까이 지속된 것은 체찰사제가 제도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였다고 여겨지는 세종대에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사례이다.
<중 략>
그러나 예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왕위는 전격적으로 자을산군에게 계승되었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왕실의 어른으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단행하게 되었다. 수렴청정은 소수의 공신과 정희왕후의 친인척이 요직에 포진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린 국왕이 즉위한 상태에서 극심한 정치적 갈등 없이 성종의 왕권이 안정될 수 있는 배경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정희왕후의 청정은 왕권을 보호하고, 성종의 왕권의 위상을 강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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