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의 역사적 의의
- 최초 등록일
- 2014.04.21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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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향교의 기원
2. 직제와 운영
3. 향교의 경제적 기반
4. 향교의 기능
5. 한·중 초기서원 교육 비교
6. 조선 후기 향교의 실상과 폐단
7. 향교의 개혁안과 수령권의 강화
8. 개혁안의 의미와 한계
9. 향교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1. 향교의 기원
고려시대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하면서 각 지방에 학교 설립되었다.
향교는 고려조에 설립되었으나 무신집권기와 몽고와 왜의 침입 등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고려 말에 지방관과 유생들의 노력에 의해 점점 그 기능을 회복하고 숫자도 증가하여, 조선이 건국되면서 향교는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다.
<중 략>
3. 향교의 경제적 기반
(1) 향교전 - 향교를 운영,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인력과 경제력을 필요로 하는데, 그 경제적 기반이 된 것은 국가에서 내려준 토지와 노비였다. 조선시대 향교전은 향교의 크기에 따라 차등을 두어 지급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각 향교가 보유하고 있는 향교전이 크게 차이가 났는데, 토지를 팔아버려 미달이 되는 경우도 있고, 지방교육육성에 관심이 있는 수령이 기부하는 경우나 기금을 모아 이자를 불리다가 토지를 매입하는 경우는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2) 향교노비 - 국가에서 향교에 지급하는 노비로 향교의 크기에 따라 그 수가 다름. 조선후기에 보면 지역에 따라 노비의 숫자가 크게 차이를 나타낸다. 조선 전기에 향교 운영의 기반이 되었던 향교 노비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대폭 감소하는데, 이는 당시 신분제가 완화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중 략>
먼저 향교의 재정원으로 둔세, 노공, 보인, 제역촌 등이 있었다.
교위전 : 향교의 토지. 향교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재임들의 부패와 양반들로 인해 교위전의 운영이 힘들어졌다.
교위노 : 국가에서 향교에 지급한 노비인데, 노비들이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재임들 때문에 도망을 가면서 거둬들이는 신공이 줄어들게 되었고 이로 인해 향교 운영이 매우 어려워 졌다.
교보 : 교위전과 교위노로 재원확보가 힘들었던 향교에서 수령의 묵인 아래 평민이나 천민에게 돈을 거두고 군역을 면제해 주었던 것.
제역촌 : 교하촌을 말함. 재임들은 이 교하촌민에게 군역과 잡역을 면제해 준다는 명목 아래 각종 집회 때 드는 제반 경비도 제공토록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