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기생
- 최초 등록일
- 2003.06.02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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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기생
2. 기생제도의 변천
3. 조선시대 기생
4. 명월관
5. 서울의 명기
6. 유흥가
7. 천인풍속개관
본문내용
다동(茶洞)에는 기생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기생은 조선시대에 팔천[八賤 (사노비, 광대, 무당, 백정, 승려, 기생, 상여꾼, 공장)] 중의 하나로 천민계층이다.
기생은 술자리의 시중을 드는 것이 적어도 겉으로 나타난 업무이다. 기생은 천민출신이지만 상대하는 남성들은 고관대작이나 상류층 인사들이기 때문에 이들과 맞상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훈련을 거친다. 춤과 노래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고 서화도 잘 그려야 하며 또 시도 잘 지어야 하고 학식도 있어야 한다. 또한 말씨도 고상한 것을 골라 써야 하며 행동도 교양있는 사람의 행동을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훈련은 몇년에 걸친 장기간의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양 정도에 따라 명기(名妓)로 알려진 초일류 기생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이름난 문인도 있으며 유명한 화가가 있고 명창 그리고 명연주자도 있다. 명기는 또한 지조가 있고 정조관념이 강해서 상대하는 남성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풍류나 멋이 없는 사람은 상대를 꺼리고 때로는 기지를 발휘하여 골탕을 먹이곤 하였다. 그러나 풍류를 알고 인품이 훌륭하여 상대할 가치가 있으면 돈이 없어도 이쪽에서 접근하여 교류를 하며 때로는 장래성 있는 젊은이의 뒷바라지도 하였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기생을 의기(義妓)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진주의 기생 논개가 대표적이고 또 잘 알려진 기생이다. 일제 때에도 항일기생(抗日妓生)들이 많았다. 진주 기생으로 명월관(明月퉓)에 드나들던 산홍(山紅)에게 친일파 이모(李某)가 당시 거금 1만원을 주고 소실로 삼으려 하였으나 산홍은 돈을 보고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하고 단호히 거절했으며, 춘외춘(春外春)은 남산 경무총감부에 불려가서 경무총감(警務摠監)으로부터 배일파(排日派)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달라면서 돈 한뭉치 주는 것을 뿌리친 일이 있었다.[註]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