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건국과 사회문화
- 최초 등록일
- 2013.12.26
- 최종 저작일
- 2013.11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발해의 건국
2. 발해의 사회문화
3. 멸망
본문내용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신라가 고구려 부흥을 지원할 정도로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좋지 않은 분위기가 싹트고, 나당전쟁으로까지 발전했다. 이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를 거뒀으나 평양 이남을 차지하는데 그쳤고 당나라 또한 평양 이북의 고구려 영토를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평양에 세워진 안동도호부가 고구려 부흥군에 밀려 요동으로 이전하였는데, 이 때 당나라는 보장왕을 보내 조선왕에 임명하고 옛 고구려 영지를 다스리게 한다. 이는 그저 옛 통치자를 임명해 고구려인들을 잘 다스리기 위함이다. 보장왕은 반란을 꾸미게 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이 일을 계기로 보장왕은 귀양가고 보장왕과 함께 온 고구려 유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러던 도중, 고구려 부흥에 가장 큰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요하 서쪽의 영주 지방인데, 그 지방은 강제이동된 고구려 유민, 거란족, 말갈족 등이 섞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696년 영주도독 조문홰가 가혹한 통치를 하자 거란인 이진충, 손만영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은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거했다. 이 때 영주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과 대조영, 말갈족 족장인 걸사비우는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영주지방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당나라는 거란족의 반란에 돌궐을 끌어들여 진압하는 데 성공하고, 거란족 출신 명장인 이해고가 항복해 당나라의 장수가 된다. 하지만 대중상 부자와 걸사비우의 고구려 부흥이 감지되자, 당나라의 측천무후(중국 역사상 유일 여황제)는 대중상에게 진국공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을 책봉해 회유하지만 둘은 거부했다. 여기서 봉작이 진국공과 허국공인 이유는 바로 이들이 세운 나라가 진국과 허국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상이 세운 진국과 걸사비우가 세운 허국의 세력을 인정함으로써 요동 지역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회유책이 실패하자, 측천무후는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어 토벌을 명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