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독립운동가 장준하, 반 독재투사 장준하
- 최초 등록일
- 2013.11.29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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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출생 배경
2. 장준하의 출생 및 성장
3. 독립 이후의 활동
4. 문화&정치 활동
5. 공개서한의 내용
6. 의문사
본문내용
할아버지 장윤희는 일찍 개명한 개화 인사로서,?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장로가 되었다.
고향 의주에 양성학교(陽成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장윤희는? 상투를 틀지 않았으며 과거를 보기 위해 ?주자학을 공부하였다. 신학문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이후 깊은 신앙심으로 아들을? 개신교? 목사로 길러냈으며, 이는 아들 장석인과 손자 장준하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 장석인은 지식인으로 기독교 학교인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1926년? 평양의?숭실전문학교?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장로교? 목사안수를 받았고,?숭실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러한 배경들은 그가 개방적 사고를 가지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장준하의 출생 및 성장
1920년 아버지 장석인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으면서 의주군을 떠나 삭주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13살이 되던 해에 그는 삭주 대관보통학교 5학년에 들어갔다.[4] 1933년 삭주(朔州)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 장석인이 교사로 근무하던 평양부 숭실중학교에 재학하였다.
1944년 일제 강점기 당시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 최기일은 자원 입대라고 진술하였다.?
최기일은 장준하의?일군?입대를 열심히 만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학도병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자원 입대한 이유를 그는 자신의 자서전 《돌베개》에서 밝혔다.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다녔던 장선생은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 버렸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친은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개신교 목사로 왜정의 요시찰 인물이었다. 학병을 기피하면 일제가 가족에 가할 탄압 때문에 학병에 지원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학병으로 지원한 다음 중국에만 파견되면 일군을 탈출하고 중경 임시정부에 편입되기를 바랬다
그는 스스로 이를 환상이라 표현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었으나, 그것만 믿고 지원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