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의의와 한계
- 최초 등록일
- 2013.11.26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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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항 이후, 사회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삼정의 문란 등 농민에 대한 수탈은 오히려 심해졌다. 이에 1894년에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도와 농민들이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일어났는데, 이를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그들이 주장했던 개혁안들이 갑오개혁에서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등 전통적인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구시켰고, 동학농민들의 잔여세력들이 의병운동에 가담하여 반일무장투쟁을 활성화시키고, 밖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직접적은 원인이 되는 등 당시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을 주도세력과 주요인물의 성격을 바탕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의 주도세력, 즉 중심세력이 농민층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60년에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에 뜻을 두었고, 이는 민중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일반 농민들이 대거 동학 조직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볼 때, 농민층이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많은 핍박과 업악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농민층이 분화가 돼 양반지주와 토호들이 향촌을 장악하였고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였다. 또 세도정치의 무리들은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서 모든 권력을 틀어쥐었다. 그들은 벼슬을 팔아먹기도 하고 이권을 독점적으로 가져가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지방수령관이 일반 농민들에게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무제한적인 수탈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국제정세를 보게 되면, 조선의 개항이후에 열강의 경제침탈이 무자비하게 시작되었다. 특히 일본의 대량 쌀 수입은 조선에 심각한 쌀 부족현상을 불러 일으켰고 소규모 자작농과 소작농들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농민층들은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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