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도 영토 주장과 우리의 대응 전략
- 최초 등록일
- 2013.11.23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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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국의 독도 영역인식(삼국, 고려, 조선, 현대)
1)삼국시대
2)고려시대
3)조선시대
4)현대시대
2. 일본의 울릉도 도해면허와 시네마현의 독도 편입
1)울릉도 도해면허
2)시네마현의 독도 편입
3. 일본교과서의 독도 영토 서술과 일본의 우경화
1)일본교과서의 독도 영토 서술
2)일본의 우경화
4. 독도 수호를 위한 우리의 전략
본문내용
1)삼국시대
우리겨레의 문헌에서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1145년)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와 열전 이사부조에 오늘날 우리가 독도로 인정하는 우산도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울릉도와 우산도라는 두 개의 섬이 우산국이라는 하나의 독립국을 형성하고 있다. 신라 22대 지증왕은 아슬라주 군주로 이찬 벼슬에 있던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케 하였고, 우산국을 정복한 뒤 6월에 신라에 귀속시켰으며,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
2)고려시대
지증왕때의 우산국 복속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오기까지 우산국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첫임금인 태조13년(930)년에 백길과 태두라는 울릉도 사람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종9년(1018)에 동북 여진족 해적들의 노략질로 우산국의 농업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여 도망나온 섬 주민들에게 농기구를 나누어 줬으며 계속해서 해적들의 침입이 끊이질 않아 현종13년(1019)에는 본토로 도망나온 우산국 민호를 지금의 경상도 영해지방에 살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의종11년(1157)의 고려사 기록은 동해중에 울릉도가 있는데, 이곳의 땅이 기름지며 주현을 설치 할 때도 있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전중내급사 '김유립'으로 하여금 조사토록 하였고, 김유립이 복명하기를 암석이 많아 백성들을 사민하기에 적합지 않다고 함에 사민 계획을 중지함 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울릉도에 다시 사민계획을 세운것은 명종27년(1197)에 "최충헌이 울릉도의 토양이 비옥하여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사민시켰는데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민호를 다시 돌아오게함"(증보문헌비고) 이라는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