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3.05.06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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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주요인물 및 시대적 배경
1.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민씨
2. 조선의 마지막 왕실 정치가, 대원군 그리고 그에게 권력을 쥐어준 신정황후 조씨
3. 개화기 때 조선(대한제국)과 외국이 맺은 여러 조약들
3. 정부에 대한 민중의 반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4. 정부의 개혁,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5. 일본이 조선의국모를 시해했다, 을미사변
6. 비운의 제국, 대한제국
Ⅲ. 전기-대한제국기(1897~1904)
1.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선포
2. 황제중심의 권력구조 확립
Ⅳ. 후기-자주외교기(1904~1910)
1. 중립화외교
2. 밀사외교
Ⅶ. 한일합방순서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Ⅷ. 맺음말
지금까지 1897년 대한제국 성립부터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퇴위하기까지 고종의 주권수호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개항이후 10여년이 지난 상황에서 고종은 갑오․을미년간의 왕권실추와 아관파천으로 이어진 심각한 국권위기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大韓帝國과 칭제를 선포한 후, 자신이 주도하에 근대화개혁을 추진함으로써 淸․露․日․英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새로이 등장한 민권운동세력으로서 독립협회의 압력이라는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황제가 구심점이 되고, 그 측근친위세력들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광무정권은 다분히 절대왕권적 권력구조로서의 특성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러한 구도 하에서 실시된 광무개혁 또한 그 역사적 단계에 걸맞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즉, 왕의 친위세력에 치우친 정책은 대다수의 관료층이나 가장 중요한 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무개혁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전통적 유교사회에서 이제 막 벗어난 당시 조선으로서는 우선 內治를 강화함으로써 위기상황을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목숨조차 위험한 당시에 고종이 당장 취할 수 있는 정책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