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납의 생애 및 역사
- 최초 등록일
- 2013.10.16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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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 유민 이납에 대한 보고서
목차
1. 당과의 대립 배경
2. 당과의 본격적 대립 시작
3. 제왕 이납, 제나라 천명
4. 제나라의 특징
5. 이 납의 죽음
6. 이정기와 이 납의 차이점
7.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 납’이란 누구인가
- 이납은 (758∼792년)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지방관.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절도사. 제나라의 제2대 국왕 아버지를 이어 절도사를 지내면서 군사력을 키워 당나라에 대응하고 경제력을 기반으로 당나라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했다.
- 당과의 대립 배경 -
781년 이정기가 병으로 죽자, 당 조정은 이 납의 권력 세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납의 평로·치청절도사 세습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 납은 같은 처지에 있던 절도사 후계자들과 연대를 맺고 당에 반기를 들었다. 이처럼 절도사들이 당 조정에 대해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던 것은 대부분 절도사직 세습에 얽힌 후계 문제 때문이었다.
<중 략>
하지만 이 기록은 우리에게 ▲제나라에서 고구려의 언어가 쓰였으며 ▲고구려계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민족의 풍습이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대외적으로는 군사전, 경제적,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하며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고, 풍부한 산물인 소금,철,주석, 비단을 신라,발해와 교역하여 경제력의 향상을 하였다. 이를 토해 당나라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기 유리해졌다.
당 조정에서 이 납의 군사력에 의지한 단편적인 이야기를 보자면, 이희열이 진주를 포위하였다. 이 납은 자신의 군사를 보내어 다른 절도사들과 힘을 합하여 총공세를 펼쳤다. 적을 크게 격파하였고, 이희열은 진주 포위를 풀었다 <구당서>
참고 자료
www.tagstory.com/100124943 (중국 속 고구려왕국의 비밀 인터뷰영상 - 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 이야기 – 지배선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齊) – 지배선
고구려 유민의 나라 제와당 그리고 신라, 발해, 일본 교류사 – 지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