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일본의 민예운동가이자 미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비판입니다.
10쪽, 참고문헌 7개입니다.
레포트 성적은 당연하 A+입니다.
목차
Ⅰ. 야나기 무네요시는 누구인가
Ⅱ.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하는 조선의 예술과 문화
ⅰ) 조선예술 비애미론(悲哀美論)
ⅱ) 막사발 예찬
ⅲ) 아! 광화문이여!
Ⅲ. 야나기, 그는 정말 조선을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문화정치인가
ⅰ) 조선예술 비애미론(悲哀美論)에 숨은 뜻
ⅱ) 차사발 예찬에 대한 비판
ⅲ) 광화문 살리기의 내막
Ⅳ. 결 론
본문내용
Ⅰ. 야나기 무네요시는 누구인가
우리나라 근대 예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야나기 무네요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대 식민지 시기 조선 예술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예술품 및 문화재 복원과 유지를 위해 애썼던 미술 평론가이자, 민예(民藝)의 개념을 정립하고, 민예운동을 일으킨 사상가이자 연구자이다. 김유경, 「야나기 무네요시의 문화관을 바라본 두 시선」, 연세대학교, 2011년, 1쪽
게다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때 글과 강연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조선을 사랑한 지식인이다. 그는 이전까지 고려청자 혹은 고려시대 문화에 비해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던 조선기대 공예 및 예술품, 건축물의 미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가치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후 조선시대의 미, 예술품에 대한 관심은 이것을 만든 조선 민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중 략>
총독부 청사가 일반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3·1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국민들의 정서가 바닥을 향해 있던 1919년 말 무렵이다. 총독부는 1912년부터 진행된 정지작업을 장막을 설치하고 은밀히 추진했고, 만세운동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틈을 타 장막을 철거하고 골조공사를 강행했다. 그러자 조선인들에게는 광화문이 없어질 것이란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광화문은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30만 조선인들의 둥심 이고, 대궐의 눈이었다. 그리고 궁궐의 해체작업이 눈앞에 펼쳐지자 다시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놨다.
이 소식을 들은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 철거를 막아 격양된 조선사회의 분위기를 가라앉혀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라지려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사라지려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광화문 철거방침을 정면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광화문을 임종을 앞둔 인간에 비유해 비통해 하며,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결국 조선의 건축물에 대한 예술적 측면이 아니라 광화문 이전을 통해 조선인들의 무력항거를 예방하고 조선총독부 건설의 정당성을 지지해준 것이라 평가 된다.
참고 자료
귄영필 외 4명, 『한국의 美를 다시 읽는다』, 돌베게, 2005년
김유경, 「야나기 무네요시의 문화관을 바라본 두 시선」, 연세대학교, 2011년
신한균, 『우리사발 이야기』, 가야넷, 2005년
안현선, 「‘민화’의 명칭분석과 재고 :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론 중심으로」,동국대학교, 2010년
이인범, 「제국주의를 넘어서 : 야나기의 조선예술론의 경우」, 『조선을 생각한다』,학고재, 1996년
정일성, 「광화문 살리기의 내막」,『야나기 무네요시의 두얼굴』, 지식산업사, 2007년
「야나기는 진정 조선예술을 사랑했을까」, 한겨례신문, 2007년. 09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