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양조사전 第六十三回
- 최초 등록일
- 2013.08.14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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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주인군망남분주 전면일군래도 위두내시당장사만보
정나라 군주는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보며 달아나니 앞의 한 군사가 도래하니 선두는 당나라 장수인 사만보였다.
鄭主大慌, 前史萬寶、後尉遲恭趕來, 兩軍夾攻, 四下無路。
정주대황 전사만보 후위지공간래 양군협공 사하무로
정나라 군주는 매우 놀라 전면은 사만보가 후면은 위지공이 추격을 와서 두 군사가 협공하니 사방에 나갈 길이 없었다.
忽聞喊聲, 郭士衡引軍殺入, 救鄭主出, 御林軍奔潰。
홀문함성 곽사형인군쇄입 구정주출 어림군분궤
갑자기 함성이 들려서 곽사형이 군사를 인솔해 쇄도해 들어와 정나라 군주를 구해내니 어림군이 궤멸당했다.
正走間, 前面又二軍到, 郭士衡出馬迎之, 乃鄭將董浚, 合兵一處。
정주간 전면우이군도 곽사형출마영지 내정장동준 합병일처
바로 달아나려는데 앞에 또 2군사가 도래하니 곽사형이 말을 내어 맞이해보니 정나라 장수인 동준으로 병사를 한 곳에 합쳤다.
後面唐兵大至, 前到北邙山, 郭士衡引軍上山, 時山下喊聲起, 唐大隊人馬已到, 周回把北部山圍住。
후면당병대지 전도북망산 곽사형인군상산 시산하함성기 당대부인마이도 주회파북부산위주
北邙山:중국 하남성[河南省] 뤄양시 북쪽에 있는 작은 산 이름. 뤄양은 B.C.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이곳에 왕성을 쌓은 이래 후한(後漢)을 비롯한 서진(西晉)·북위(北魏)·후당(後唐) 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서 역사적으로 번창하였던 곳으로 그만큼 뤄양에는 많은 귀인·명사들이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뒤 대개 북망산에 묻히고 있어 이곳에는 한나라 이후의 역대 제왕과 귀인·명사들의 무덤이 많다. 북망산이라고 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지금도 ‘북망산천(北邙山川)’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북망산 가는 길’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시사상식사전, 2013, 박문각)
뒷면에 당나라 병사가 크게 이르러서 앞에 북망산에 도달하니 곽사형이 군사를 이끌고 산에 올라서 이 때 산에서 함성이 일어나니 당나라 대부대의 군인과 말이 이미 도달하여 북부의 산을 둘러싸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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