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론] 허균
- 최초 등록일
- 2013.05.25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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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시대적 배경
Ⅱ. 호의 뜻 (교산, 학산, 성소, 백월거사)
Ⅲ. 작품 (1) 성소부부고- 성수시화 서문
Ⅳ. 작품(2) 문파관작
Ⅴ. 시대적 과제
Ⅵ. ‘허균’의 한계
Ⅶ. 결론
본문내용
Ⅰ. 시대적 배경
그가 살던 시기는...
선조대에 사림파의 정치력이 형성되면서 사화가 끝이 나고
정치권에 진출한 사림 사이에 당쟁이 시작되었던 시기
Ⅱ. 호의 뜻 (교산, 학산, 성소, 백월거사)
개울 동쪽의 산줄기는 오대산 북쪽으로부터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내려오다가 바닷가에 와서 사화산의 수자리가 우뚝 솟았다. 그 아래로 예전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개울이 엇갈리는 곳의 밑바닥에 늙은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
가정 신유년(1561) 어느 가을날, 이무기가 그 바윗돌을 깨뜨리고 사라져버렸다. 바위가 두 동강이 나면서 문처럼 구멍이 뚫렸으므로, 사람들이 교문암이라고 불렀다.
<중 략>
○ 왜 `성소부부고`라 이름 지었을까?
- 이 서문에서 그의 겸손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의 글재주를 뽐내기 위해 쓴 것 같은 자부심의 표현이 자주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는 왜 겸손의 뜻을 표현한 성소부부고라는 명칭을 붙인 것일까 이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양웅의 글이다. 양웅은 전한 말의 학자 겸 문인으로 한나라를 대표하는 식견을 지녔던 인물로 뛰어난 문장가로 꼽힌다. 성소부부고의 ‘부부’라는 말은 이 양웅의 글에서 나온 말로 자신의 글이 그와 견줄만 하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바로 그의 아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중 략>
그가 하늘의 본성을 따르는 것을 어떤 의도를 숨기기 위한 개혁을 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을 것이다. 허균은 그 당시 삶은 옛날 방식으로 하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야 했고 자신이 직접 대중을 이끄는 호민이 되고자 한 것이다. 왕권이 미약했으므로 판을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반상차별을 없애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자 소외된 계층의 힘을 빌렸던 것이다.
이미 기득권층을 낡았으므로 개혁이 왕만 바뀌는 것은 의미가 없었기에 아래로의 세력을 키우고자 했던 그의 고민을 알 수가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