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답사문-건축미학적 관점
- 최초 등록일
- 2002.12.16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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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묘에 대한 예술적부분을 중심으로 역사, 사회측면 조금 건드려 봤습니다.
종묘 안내 봉사 하면서 쓴 것!!
목차
처음
본론
1. 종묘의 역사
(1) 연혁
(2) 경내 각 건물
(3) 종묘제례
2. 종묘의 정치적 배경 - 왕조의 정통성을 위하여
3. 종묘의 역사성
4. 종묘의 예술적, 구조적 가치
5. 종묘의 현재적 가치
마침
본문내용
원래 종묘란 正殿을 가리키며, 太廟라고도 한다. 중국의 우(虞)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종묘제도는 殷․周시대에는 7대조까지 묘에 봉안하는 7묘제가 시행되다가 明나라 때에는 9묘제로 바뀌었다. 한국의 경우 종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92년(高句麗 故國壤王 9)에 보이며, 신라에서는 5묘제, 고려에서는 7묘제로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제후국의 위치에서 5묘제도를 따르다가 중기 이후부터는 치적이 많은 왕은 5대가 지나도 정전에 그대로 모셨으며, 그 밖의 신주는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는데, 이를 조천(伯遷)이라고 하였다.
종묘의 제도는 BC. 6C. 제나라에서 편찬된 <周禮>에 종합되어 정착되었다.
<周禮>의 <考工記> 에 따르면 “左廟右社, 面朝後市”라 하여 궁궐에서 남향으로 좌측에는 종묘, 우측에는 사직을 두며 조정을 바라보고 뒤에는 시장을 둔다고 기록한다. 이런 <周禮>에 의한 배치는 실현가능성이 없는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엄격하게 적용되어 북경의 자금성의 경우 천안문과 태화전을 잇는 축으로 하여 좌측에는 종묘(현재의 인민청년문화궁전)가 우측에는 사직단과 바로 그 아래에는 천단이 위치하고 있다. 이는 황제국만이 가지는 하늘에의 제사 때문이다. 서울 종묘의 경우에도 근정전과 옛 광화문 자리를 잇는 축으로 좌측에는 종묘가 우측에는 사직단이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그것처럼 반듯반듯 자로 잰 듯이 정확하지는 않아 지리적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