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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3.30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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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윌리엄 글래드스턴과 대중청원운동
Ⅲ. 윌리엄 글래드스턴과 노동계급
Ⅳ. 윌리엄 글래드스턴과 존 스튜어트 밀
Ⅴ. 윌리엄 글래드스턴과 클레멘트 애틀리
Ⅵ. 윌리엄 글래드스턴과 비아지니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개요
대중적 자유주의와 접촉이 없었던 글래드스턴은 1860년대부터 ‘체통 있는’ 노동계급을 정치에서 도덕적 호소에 반응할 잠재력 있는 집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대중 또한 글래드스턴에게서 자신들의 급진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대변자를 발견하였다. 말하자면 글래드스턴이 ‘인민의 윌리엄’이 되고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 것은 양자의 상호작용의 산물이었다. 1876년 불가리아 사태 이후의 글래드스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것이라고 지적한 매튜의 주장을 확장한 비아지니는, 글래드스턴의 카리스마가 대중민주주의를 전통적 자유주의와 화해시켰다고 봄으로써 노동계급 급진주의의 합리주의를 부각시킨다. 이로부터 자유당과 자유주의는 글래드스턴과 동일시되었고, 대중의 자유당 지지는 자유당을 명실상부한 국민정당으로 만들었다. 그것의 이념적 기반은 디즈레일리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던 미드로디언 유세(1879-80)에서 글래드스턴이 ‘인민’이 국민 전체의 ‘재정적 정직’의 보호자라고 천명한 데 있었다.
<중 략>
그러나 비아지니에 따르면, 20세기와 글래드스턴 시대의 맥락과 배경은 전혀 달랐다. 최소국가론(재정긴축)은 19세기에는 우파 아닌 급진 좌파의 주장이었다. 당시에 구빈과 교육은 지방세로 운용되고 있었고, 중앙정부의 재정은 실제로는 사회적 목적에는 거의 지출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재정은 대체로 간접세에 의존하였다. 이 점에서 19세기의 긴축과 감세는 ‘사회적 관심’의 정책으로서 20세기의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무관심’의 정책과는 달랐다. 당시에는 보호무역과 곡물법이 빈곤과 사회불안의 원천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자유무역주의로의 전환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대처 시대의 중앙집중화(centralism)와는 달리 지방정부의 책임과 예산이 최소재정론에 부수하였다. 따라서 중앙에서는 자유방임(탈중앙집중화), 지방에서는 시의회나 지방교육청에 의한 ‘자치시 사회주의’가 병행하였다. 더군다나 1868년의 전보 국유화에서 보듯이 자유방임 원칙은 모든 차원에서 ‘실용적인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글래드스턴은 빅토리아 시대의 자유방임의 주요한 건설자였지만 대처와는 달리 국가에 관한 유기체적 견해를 견지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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