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광수 그리고 무정
- 최초 등록일
- 2013.01.12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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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작가 이광수의 업적&생애, 그리고 그의 작품 무정에 대해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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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무정>, ‘이광수’에 대하여
이광수는 누구인가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1902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 후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겨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의 추천으로 도일 도일(渡日) : 일본으로 건너감
하여 메이지학원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07년 백혜순과 중매로 결혼하였다. 1909년 11월 한 달 동안에 <노예>, 일문 <사랑인가>, <호>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엔 <정육론>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1910년 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재직 당시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1913년 스토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이어서 <소년의 비해>, <윤광호>, <방황> 등을 탈고하고 <청춘>에 발표하였다. 또한 1917년 두 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폐환이 재발하였고, 허영숙의 간호로 살아나게 된다. 전통적인 부조 중심의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 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 <자녀중심론>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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