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 수용과 무속
- 최초 등록일
- 2012.12.28
- 최종 저작일
- 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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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개신교에서 나타난 특이성을 무속과의 영향관계속에서 파악함, 시기는 선교초기 1884~1910년으로 한정하고 한국 개신교와 무속과의 관계파악
목차
머리말
1. 개신교 전래와 수용
2. 내한선교사들의 무속인식
3. 선교활동에서 나타난 무속적 요소
1) 교리적 차원
① 지고신인 하나님의 대한 개념
2) 개인적 차원
① 개종체험
② 전도인의 축사행위
③ 부흥사의 무속화
3) 제의적 차원
① 새벽기도회
② 성미운동
맺음말
참고 문헌
본문내용
머리말
1884년 최초의 선교사가 내한한 이후 1세기를 지나온 한국 개신교는 그 동안 양적 팽창을 이루었다. 그 이면에는 무속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무속적 요소는 개신교 본연의 문화에서는 해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본고는 개신교 내의 무속적 요소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1884~1910년 선교초기를 중심으로 개신교의 수용과 내한 선교사들의 무속인식, 선교활동에서 나타난 무속적 요소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개신교 초기역사 연구는 백낙준의 『한국 개신교회사』에서 출발한다. 그는 선교사관을 중심으로 1832년부터 1910년의 교회역사를 선교사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그는 서구 역사학의 실증적 방법론에 충실함으로서 그의 연구가 서구의 역사학적 방법을 충분히 구사하면서 역사학과 선교학을 종합하는 관점에서 생산해 낸 업적이란 평을 얻었으나 한국교회의 고백과 증언이 전혀 고려되지 못한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그 후 선교초기 역사 연구는 통사(通史)연구와 맞물려 연구 되었다.
<중 략>
전통적으로 집안의 가신을 모시는 것은 부인들의 몫이었다. 부인들은 ‘성주단지’라 해서, 정기적인 고사와 제사를 위해 부엌에 별도의 항아리를 놓고 매 끼리 마다 조금씩 쌀이나 곡식을 덜어 두었다가 때가 되면 그것으로 떡을 하거나 제사 비용으로 충당하던 습관에 익숙하였다. 그런데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가신을 섬기는 일과 제사를 금하게 됨으로 별도의 항아리가 필요 없게 되었지만 전도인의 생활비를 위한 자금 헌금운동이 일어나면서 항아리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교인들은 그것을 ‘주의 항아리’라 불렀다. 가신을 대신하여 주님을 위해 쌀을 모았던 것이다.
이처럼 개성에서 시작된 성미운동은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어 여성교인들의 신앙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운동 역시 선교사들의 지시나 권유가 아닌 한국교회여성들의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또한 끼니마다 쌀을 한 줌씩 떼면서 기도하는 행위는 기독교 신앙이 보급되지 전부터 가정부인들이 행해오던 전통적 무속적 신앙의 한 형태이다. 이 같은 무속적 행위가 익숙했던 한국여성들이 개신교 신앙 보급 이후 그런 행위의 내용을 개신교적으로 재해석하여 그 형식을 수용한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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