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발표문
- 최초 등록일
- 2012.12.04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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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령왕릉 구조, 무령왕대의 국제교류, 무령왕릉 출토 유물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목차
1. 무령왕릉의 구조
2. 무령왕릉 출토유물
3. 무령왕대 백제의 대외교류
본문내용
1. 무령왕릉의 구조
무령왕릉은 벽돌을 구워서 만든 터널형태의 전축분(塼築墳)으로 무덤의 내부는 크게 연도(羨道)부분과 묘실(墓室)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외부는 석회혼합토(石灰混合土)를 이용하여 봉분(封墳)을 높고 웅장하게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봉분의 경우는 퇴적과정을 통해 대부분이 유실되어 현재로서는 축조 당시의 정확한 모습과 규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무령왕릉의 내부구조를 살펴보면, 입구에 해당하는 연도부가 실이 2.9m, 너비1.04m, 바닥으로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는 1.45m이며, 천장의 모습은 반원형의 터널형태를 이루고 있다. 연도를 구축하고 있는 전(塼)돌의 배열은 바닥부터 시작하여 4단까지는 가로쌓기를 하였고, 5단째는 세로쌓기로 축조하였는데, 이러한 순서는 천장의 시작점까지 반복된다. 이후 천장부분에 이르러서는 사다리꼴모양의 전(塼)돌을 별도로 제작하여 터널모양으로 쌓아올려 마감하였다.
<중 략>
백제의 대외교류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백제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왔음이 확인된 바 있지만, 무령왕대의 경우처럼 대규모로 그 흠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다면 무령왕대에 이르러 왜 백제가 그토록 활발한 대외교류에 힘썼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백제의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475년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수도한성(漢城, 지금의 서울)을 빼앗기고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천도(遷都)하게 된다. 천도 직후, 백제는 권력찬탈을 노리는 귀족세력의 반란으로 인해 왕권의 존립기반이 위협받는 등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휩싸인다. 이로 인해 당시 문주왕(文周王). 삼근왕(三斤王). 동성왕(東城王) 모두가 귀족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는 등 참담한 상황이 전개 된다. 동성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무령왕(武寧王)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먼저 반란귀족세력을 토벌하여 안정을 추구하고, 외부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해상교통로를 통해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토 교류의 주된 대상이었던 중국의 북조(北朝)와는 고구려의 방해가 심해 원활한 교류를 시행하지 못했지 때문에 백제는 중국 남조와의 외교루트를 새로이 개척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중국 남조의 왕실묘로 주로 사용된 전실분(塼室墳)이나 중국의 남부에 위치했던 월주요(越州窯)에서 생산된 도자기 들이 대거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