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대구지방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02.12.05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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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국채보상운동
-경상감영공원
-약령시
본문내용
1904년의 고문정치(顧問政治)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借款)을 도입하게 하였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5년 6월에 구채상환(舊債償還) 및 세계보충비(歲計捕充費)로 도쿄[東京]에서 200만 원의 공채(公債)를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전국민이 주권 수호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徐相敦)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발기인은 서상돈을 비롯하여 김광제(金光濟) ·박해령(朴海齡) 등 16명으로, 이들은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를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전국민의 호응으로 서울에서는 김성희(金成喜) ·유문상(劉文相) 등이...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