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역사의 왜곡
Ⅱ. 임나일본부 논쟁사
1.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2. 일본열도 내 분국설
3. 위왜 자치집단설
4. 백제군사령부설
5. 임나 지배설의 축소 및 외교 교역설
6. 안라왜신관설의 제기
Ⅲ.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1. 일본서기
2. 광개토왕릉비
3. 칠지도
Ⅳ. 가야와 일본의 관계
Ⅴ. 역사바로세우기
본문내용
19세기 후반 명치유신 이후 몇몇 일본 정객들에 의해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한반도를 정벌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면서 일본 국내에서는 『고사기』나 『일본서기』 등 고대 문헌에 전하는 신공황후의 신라정벌 전설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일본의 옛 전설일 뿐, 이를 입증할 만한 어떤 기록도 한국계통의 기록에는 없었는데, 당시 고구려의 옛 수도인 만주 지안에서 발견된 광개토왕릉비에서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왜구를 여러 차례에 걸쳐 격파하여 물리쳤다는 기록이 나오자, 이 논의는 활기를 띠었다.
1.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패전 이후 일본 국내에서는 『일본서기』의 불확실성을 비판하던 학자가 재평가되고 일본천황의 계보에 의문이 제기되는 등 그때까지의 황국사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중 하나로 1949년 도쿄대 고고학 교수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에 의해 일본 고대사 관련 토론석상에서 발표되었다가 1967년에 책으로 출판된 '기마민족 정복왕조설(騎馬民族 征服王朝說)'이 있는데, 특히 그의 학설은 언론을 통해 일본 국내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일본의 고고학 자료들을 종합해볼 때, 일본 고분시대 초기인 3세기 말부터 4세기 말까지의 고분에서는 청동투겁창, 청동말종방울, 청동거울, 돌팔찌 등 비실용적이고 제사의례적인 유물이 주로 출토되어 그 문화의 내용이 평화적이고 농경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그러나 고분시대 후기인 5세기 이후 6세기의 고분에서는 철제의 큰 칼, 긴 창, 갑옷과 투구, 마구 등 실용적이고 전투적인 유물이 주로 출토되어 그 문화 내용이 기마군단에 의한 정복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급변했다고 했다.
참고 자료
·성은구 역주, 『日本書紀』, 고려원, 1993.
·井上淸 저·서동만 역, 『일본의 역사』, 이론과 실천, 1995.
·김기흥,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역사비평사, 1994.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이기백 외, 『韓國古代史論』, 한길사, 1988.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한국 전근대사의 주요 쟁점』, 역사비평사, 2002.
·이기백, 『韓國史 市民講座』제3집, 일조각, 1997.
·이기백, 『韓國史 市民講座』제11집, 일조각,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