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교회사
- 최초 등록일
- 2012.09.30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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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 교회사역사
목차
1) 보니파시오 8세 - 중세의 마지막, 근대의 시초
2) 아비뇽의 교황직
3) 서구 대이교
4)전사
5)콘스탄츠, 일치 공의회
6)요한 후스와 콘스탄츠에서의 그의 재판
7)교황의 선거 및 공의회 이후, 바젤의 공의회 우위설
8)르네상스 교황
9)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 율리오 2세
본문내용
근대 교회사
1) 보니파시오 8세 - 중세의 마지막, 근대의 시초
완전히 변화된 세계에서 교화의 지도권 주장을 다시 한번 과시하려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시도는, 하나의 진기한 시대 착오처럼 보인다. 종교적인 깊이가 없고 현실생활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 지나치게 권위의식을 지녔던 그는, 교황의 지도하에서의 신정정치적인 서구의 세계국가 수립을 꿈꾸고 있었다. 이때 그는 교황직의 명성이 황제권과 정치적인 권력투쟁을 한 수년 동안에 얼마나 큰 손상을 입었는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세계 지배를 위한 계획들을 추구하고 있던 프랑스의 필리프 미왕에 대하여 그가 교황권의 영적, 정치적 우위를 시행하려고 [우남상탐] 칙서에서 양검론을 끌어대고 교황에 대한 순명이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언명하였을 때, 중대한 결과를 낳는 투쟁이 벌어졌다. 필리프는 교황의 파문에 대하여 공의회에 상소로써 응수하였고, 1303년 9월 소수의 군대로 하여금 아나니에 있는 교황의 성에서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아나니의 시민들이 2일 후에 교황을 구출하였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폭력행위는 교황직의 무력함과 정치적으로 무의미함을 충분히 드러냈다. 교황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 지배의 꿈이 무너진 후 얼마 오래 살지 못하였다. 몇 주후에 그는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그와 더불어 교황직의 보편적이고 중세적인 우위성은 끝났다.
< 중 략 >
3) 서구 대이교
이교는 그레고리11세(1370~1378)의 사망 후 일어났다. 1377년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 후 1378년 그레고리 11세는 사망 하였고, 이 후 교황 선거법에 따라 콘클라베가 70여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실시되었다. 하지만, 16명의 추기경 중 11명이 프랑스인이었고, 로마인들은 다시 프랑스인 교황이 나올 것을 불안해 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바타칸에 있는 교황 선거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선거 전날 무장한 무리들이 콘클라베 장소에 침입하여 심한 협박으로 로마인이 선출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추기경들은 자신들이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1378년 4월 8일에 이탈리아인을, 즉 바리의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이는 우르바노 6세였다.
추기경들은 우르바노의 대관식을 위하여 4월 18일 확실히 로마로 돌아왔고, 또한 교황에게 충성의 선서를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