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인조반정의 재평가
- 최초 등록일
- 2012.06.23
- 최종 저작일
- 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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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 자료는 한국사 입문 레포트의 일환으로 작성된 광해군과 인종반정의 재평가 자료입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바탕으로 광해군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인조 반정의 부당성을 자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레포트 평가는 수강생 36명 중 1등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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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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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1 ~ 2
II. 본론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2 ~ 11
1. 정당한 반정인가 왕위 찬탈인가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2 ~ 4
1) 인조반정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2
2) 반정의 주체 그리고 명분은 무엇인가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2 ~ 3
3) 인조반정의 모순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3 ~ 4
2. 왜란 중의 광해군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4 ~ 5
3. 즉위 후 광해군의 내치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5 ~ 8
1) 험난한 즉위과정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5 ~ 6
2) 연립 정국 구상과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 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6 ~ 7
3) 왕권강화와 폐모살제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7 ~ 8
4. 광해군의 외교 정책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8 ~ 10
1) 당시의 국제정세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8 ~ 9
2) 광해군의 외교정책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9 ~ 10
5. 광해군 재평가의 이유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11
III. 결론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12
IV. 참고문헌 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ⵈ P. 12
본문내용
II. 본론
1. 정당한 반정인가 왕위 찬탈인가
1) 인조반정
광해군은 1623년(광해군 15), 서인 일파가 주도한 정변에 의해 폐위되었다. 광해군정권을 전복하려는 기도는 1620년경부터 추진되었는데 이서, 신경진 등이 계획을 세운 뒤 김류, 이귀, 최명길 등의 문신들을 끌어들었다. 반정을 모의한 서인 일파는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 종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한 뒤, 1623년 3월12일 창덕궁을 기습했다. 반정주체들이 동원한 반란군은 대략 1,000여 명 정도였다. 병력 자체가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장단부사 이서가 거느리던 400여 명 외에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왕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막강한 훈련도감군이 거사 전 훈련대장 이홍립의 포섭으로 무력화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반정주체들은 궁궐 담을 넘어 도망친 광해군을 체포한 뒤 사태를 평정하고 정릉동 행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뵙고, 그녀의 위호를 서궁에서 대비로 회복시킨 뒤 옥새를 넘겨받아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인조이고, 이일이 인조반정이다.
반정이 성공한 직후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일어났는데 이이첨과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 수뇌부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북인들이 축출된 관직에는 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반정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던 남인들이 제수되었다. 특히 반정을 모의하고 거사를 주도했던 김류, 이귀 등 서인계 인물 53인은 ‘정사공신’에 책봉되었고 이들은 이후 조정을 좌우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참고 자료
이희근. 「쿠데타로 들어선 고립화의 길」.『주제로 보는 한국사』. 2005. 고즈윈
이이화. 「국가재건과 청의 침입」.『한국사 이야기12』. 2000. 한길사
참고문헌
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광해군 다시보기」.『역사비평 44호』. 1998. 역사비평사
한명기. 『현명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2000.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