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장원제
- 최초 등록일
- 2012.06.06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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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국과 프랑스의 장원제도와 귀결을 비교, 분석합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초기의 고전장원제
Ⅲ. 11세기 영국의 장원
Ⅳ. 11~14세기의 장원제
Ⅴ. 14세기 이후 경제상황의 변화
Ⅵ. 결론 : 장원제의 귀결
본문내용
Ⅰ. 서론
현재 프랑스 지방의 경작지의 특징을 보면 대부분 길게 뻗은 밭들이지만 영국은 이와 다르게 울타리로 구획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현재 농업종사자의 수나 경지면적의 비율을 보면 프랑스가 좀 더 많다. 블로크(Marc Bloch)는 이것이 결코 자연현상의 영향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이런 현상은 사회적 제도의 차이로 인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의 장원제를 비교하려 한다. 장원제는 중세 시대의 보편적인 사회 형태였으나 프랑스에선 ‘세뇨리(seigneurie)’, 영국에서는 `매너(manor)`라고 불렸다. 같은 장원제의 형태로 분류된다 하더라도 두 나라의 형태는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각국의 장원제는 출발과, 진행 과정과 귀결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중 략>
Ⅴ. 14세기 이후 경제상황의 변화
프랑스에서는 영주직영지의 축소로 소동이나 중농의 수가 많아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두 나라 모두 농민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프랑스의 농민이 영국 농민보다 상대적으로 비참했다. 주요 원인 중 하나로는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에 의한 막대한 피해가 있다. 백년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프랑스는 전국토의 심한 황폐화가 일어났다. 또 다른 원인은 영주에 대한 농민의 공납부담에 이은 국왕에 대한 조세부담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농민들은 장원을 떠나게 되고 마을 주민은 외부인들로 보충되게 된다. 이후 그들에 의한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 가장 민감한 것은 자신의 수입을 만회하기를 바라는 영주들이었다. 영지의 재건과정 중에서 장원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우선 영주는 외부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과거 토지보유자들보다 좀 더 유리한 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로 인해 장원은 영주에게 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조직으로 변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