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자서전
- 최초 등록일
- 2012.05.31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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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믿고 써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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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면서 나는 비폭력 운동의 대해 많이 배워왔다. 그것은 일제 치하에서 있었던 3.1운동이 바로 비폭력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전 세계적으로 식민치하의 있는 식민지,반식민지 약소민족이 위축된 상황에서 급전환하여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일으키는 계기를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인도에서는 국민회의파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고양되었고, 그들은 영국의 식민지 간접통치의 구조적 특징을 활용하여 비폭력 투쟁방법까지 채택하여 급속도로 성장하여 드디어 1945년 4월 5일부터 일어난 사타야그라하 사브하운동은 내부요인을 별도로 하고 외부요인을 보면 3.1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임을 배웠다. 물론 시기적으로 우리나라가 먼저 했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우리로 인함을 이야기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다. 내가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와 인도의 독립운동의 근접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중략>
보어전쟁에서 그는 개인적인 동정심은 보어인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환자 수송병 의용대를 지원하여 겨우 허가를 얻었다. 여기서 그의 부대는 6주간의 복무를 하였고 전투선 밖 뿐만아니라 안에서도 환자들을 돌보았다. 여기서 전쟁 중에 맺어진 백인과의 관계가 참 아름다웠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보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뒤에도 인도인들의 처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1906년 트란스발 정부는 극히 굴욕적인 인도인등록 법령을 제정했다.
군무 후 그는 인도로 돌아왔다. 돌아갈 때 많은 이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에게 너무 과분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소박한 삶을 살았기에 그것을 민간인에게 나눠주기로 결심한다. 아이들은 모두 동의했고 아내를 설득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의 결심은 확고했기 때문에 결국 민간인에게 나눠주게 된다. 사티아그라하 투쟁에서 사티아크라하의 원형인 소극적 저항의 투쟁에서 죽음을 걸고 아시아 등록법 반대케 할 때에도 간디는 집단적 방식이 아니라 개개인이 그 책임과 발의 하에 서약을 한다는 방법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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