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에 대한 새로운 인식
- 최초 등록일
- 2012.05.02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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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궁예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대해서 조사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궁예에 대한 기존 인식
3. 왕건과 궁예의 차별성
1) 궁예의 호족정책
2) 신라에 대한 궁예의 적대감
4. 궁예·왕건정권의 연속성에 관한 논거
1) 국호의 계승
2) 자주적 연호 사용
3) 정치체제의 계승
4) 대외정책 계승
5) 종교사상적 측면
5.결론
본문내용
1. 서론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있어서 궁예의 역할은 실로 엄청나다 할 수 있다. 고려는 궁예가 건국한 태봉과 정치ㆍ경제ㆍ사회면에서 매우 유사하며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궁예에 대한 극단적 사실과는 달리 고려 왕조를 건국한 왕건은 궁예를 자신의 멘토이자 스승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악인으로 후대로부터 미움을 받아야하고 왕건은 선인이자 영웅으로 칭송을 받아야 하는가. 이는 고려왕조를 개창한 왕건과 대신들이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고 이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궁예를 악의 화신이자 무자비한 왕으로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 위함이었다. 즉, 역사란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 역사에 있어서 절대악과 절대선은 있을 수 없고 역사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궁예가 타도되지 않고 태봉의 정권이 이어져도 후세에 왕건이 선인으로, 궁예가 악인으로 평가될 것인가. 이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만한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궁예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함을 느꼈고 태봉과 고려초기의 유사성 즉, 궁예와 왕건의 정치체제, 대외관계 등에 있어서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속에서 포악한 왕으로만 알려졌던 태봉의 궁예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을 시도하려고 한다.
2. 궁예에 대한 기존 인식
고려시대 김부식 등에 의해 기전체로 편찬된 삼국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궁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내용으로 궁예 휘하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왕건을 추대하였다는 사실이 나온다. 그러나 인심이 변하게 된 역사적 경위나 결과 등에 관한 인과적 해석은 전혀 없고, ‘의’라고 하는 왕건파의 명분에 의해서 혁명의 당위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에는 궁예의 ‘불의’에 대한 내용은 찾아 볼 수 없고, 「삼국사기 궁예열전」에 상상하기 어려운 비도덕적이고 참혹한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열전에서 궁예는 악인으로서의 예정된 운명이며, 종교적인 저주로 궁예를 그리고 있으며 그 밖에도 궁예의 행차를 국왕의 행차임에도 승려의 행차로 그리는 등 전반적으로 궁예를 폄하하고 부정적인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더욱 궁예의 악덕한 면이나 포학함이 강조되어 서술되었다. 고려사에서 더욱 잔인하고 악독하게 묘사된 궁예의 모습은 그 후대에도 여과 없이 계승되어 이후 간행된 관찬, 사찬 사서들에서 궁예관련 기사가 거의 그대로 인용되고 있으며 궁예에 대한 평가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이러한 전승은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여사제강」, 「휘찬려사」 등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참고 자료
김두진(2005), 한국문화 속에서 궁예를 생각한다.
김두진(2005), 태봉과 철원정도 1100주년 의 역사적 의미와 재평가. 철원군 태봉국철원정도기념사업회
이재범(2001). 궁예-나쁜 왕에서 패한 왕으로. 내일을 여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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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성(2006). 신라의 해체와 후삼국의 정립 ; 궁예의 후고구려건국과 관련한 두 문제.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정재준, 최진우(2009). 통합한국사. 고시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