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에 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1.12.31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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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해에 관한 레포트로 칭찬받고 A+ 받았습니다.
목차
가. 머 릿 말
나. 新羅와 渤海의 境界와 相互關係
나-(1) 渤海의 領域擴張과 新羅와의 對峙
나-(2) 新羅와 渤海의 歷史的 關係와 交涉
다. 新羅人의 渤海認識과 變化
다-(1) 新羅人의 渤海認識
라. 맺 음 말
본문내용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칭호를 들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한 문화국가를 건설하였으나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이질적인 요소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로 내부적인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취약성이 927년 거란에 의하여 쉽게 멸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발해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국 북방의 새외민족과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적인 요소를 가지긴 하였으나 활발하게 팽창하는 성격을 갖지 못하고, 철기문화가 일반화됨에 따라 향상된 농업·목축등의 경제력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에서 자급자족하는 가족세력을 재편성한 것에 불과하였다.
발해의 멸망한 뒤에 그 문화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발해의 문화를 담당한 지배층인 고구려 문화 지배층인 고구려 유민이 고려로 망명해 버리고 이 지역에 거주하던 말갈인은 그를 계승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후 거란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금을 건국하고 거란을 축출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발해는 말갈인의 이러한 발전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발해의 멸망과 함께 만주는 우리 민족의 역사무대에서 떠나버리고 말았다. 발해는 우리 민족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만주를 지배한 최후의 국가였던 셈이다. 발해가 차지하는 민족사적 위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귀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정치적·문화적으로 한국사의 주류에서 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신라와는 남·북국으로 서로 대립관계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당에게는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참고 자료
발해의 종족구성과 신라의 발해관, 이동휘, 2004, 부산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경계로 보는 신라와 발해의 관계, 이동휘, 2003, 역사와 경계 47
한국사통론, 변태섭, 2007, 삼영사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上, 한국사연구회, 2008, 지식산업사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송기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