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중국의 농민의 반란은 종교적 조건에 의하여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봉기하는 경우였다. 따라서 반란층에 농민의 계급적 요구는 표출되지 않고 은폐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직접 농민 사이에서 일어난 지도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지도자, 촌락공동체의 유력자, 족장, 상인 등에 의하여 지도되는 수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반란은 사회발전의 각 단계에 대응하여 그 성격·형태에 변화가 보이며, 근세에 이르러서야 농민적 요구가 반란 목표로 표면화하였다. 또한, 농민반란은 왕조의 지배권력을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결과는 다시 옛 형태의 왕조지배가 부활하는 데 그쳤다.
목차
머리말
Ⅰ. 명대 농민반란의 배경
1. 중앙 지배체제의 균열
2. 화폐경제의 침투
Ⅱ. 농민반란의 구성원과 역할
Ⅲ. 명대 중기의 반란
1. 형양 유민의 난
2. 등무칠의 난
3. 유육과 유칠의 난
Ⅳ. 명대 말기의 반란
1. 이자성의 난
2. 장헌충의 난
Ⅴ. 청대 초기 백련교도의 반란
1. 반란의 배경
2. 반란의 발발
Ⅵ. 청대 말기 태평천국의 반란
1. 반란의 배경
2. 반란의 발발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Ⅲ. 명대 중기의 반란
1. 형양의 난
농민의 세역부담이 무거워지고 불균등이 심화하는 등 여러 모순이 드러나면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불균등이 심화하는 등 여러 모순이 드러나면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이주, 유망하는 풍조가 가속화했고, 명조의 인민통치의 기초인 이갑제는 질서는 무너져 갔다. 이갑, 향촌을 이탈한 농민은 도시로 흘러들어 날품팔이나 일용노동자, 유력자의 노비, 무뢰, 곤도의 하수인 등 도시 하층민을 형성하거나, 토지에 여유가 있고 농경여건이 더 나은 관향으로 가서 개척농이되었다. 특히 행정력이 잘 미치지 않아 세역부담을 피할 수 있는 성과 성 사이의 산간 접경지대로 많이 흘러들었으니, 소위 형양(衡陽)지역이 대표적인 곳이다. 형양지역은 한수 중, 상류에 해당하는 곳으로, 그 중에서 특히 하남, 호북(湖北), 섬서 세 성의 접경지대는 인근 성에서 온 여러 종류의 유민들이 많이 이주해 왔다. 이 일대로 이미 원대부터 유민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으나, 15세기 전반 명 선덕연간(1宣德年間)부터 본격적으로 많은 인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변의 산서(山西), 섬서, 호광(湖廣), 하남(河南)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나, 산동(山東), 강서(江西), 남직례(南直隷)에서 온 유랑민도 적지 않았다. 요컨대 화중, 화북의 거의 전 지역에서 배출한 유민이 형양지역으로 유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덕3년(1428) 산서의 기민 10만 명 이상이 이곳으로 유입되었고, 정통2년(1437)의 대기근 때에는 입산개간자가 15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참고 자료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오금석 외, 2007, 이산
중국민중 반란사, 다니가와 미치오, 1996, 혜안
중국제국의 몰락, F.웨이크만, 1987, 예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