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1.12.06
- 최종 저작일
-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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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물로 본 서양고대사의 카이사르 편을 요약하고 그에 대한 코멘트를 단 글입니다. 인물 카이사르에 대한 조사와 평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리포트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카이사르
<왕이 되고자 열망하다가 죽어서 신이 되다-김덕수>
1. 카이사르의 가정환경과 민중파로서의 경력이 과장된 초기 생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태어났다. 그가 속한 율리우스 씨족은 전설의 시대인 트로이 전쟁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명문 씨족이었지만 율리우스 씨족이나 카이사르 가문에서는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전 100여 년 동안 콘술을 단 한 명 배출했을 뿐이었다. 다만 고모 율리아가 당대 민중파의 우두머리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혼한 것을 보면 카이사르 가문을 비천한 가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의 청년기는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와 술라가 이끄는 귀족파가 권력투쟁을 벌이는 내전기로 카이사르 가문은 율리아의 남편이 마리우스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민중파로 분류되었다. 카이사르가 12세 되던 해 술라가 콘술로 선출되고 이어서 오리엔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확정되면서 로마 정치는 급속도로 보수화했고 마리우스가 쫓겨난 뒤 민중파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콘술로 선출된 킨나는 원래 귀족파였으나 술라가 오리엔트에 나가 있는 사이 민중파로 돌아서 마리우스를 다시 로마로 불러들였다. 마리우스는 술라파 원로원들과 그를 지지했던 부유한 기사들을 대량 학살했다. 이어 마리우스는 킨나와 함께 콘술로 선출되었으나 13일 만에 70세의 나이로 죽었고 킨나의 민중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84년 민중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킨나는 살해당했고 83년 봄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온 술라가 민중파와 내전을 펼쳐 승리하여 로마는 다시 귀족파의 세상이 되었다. 술라는 마리우스보다 더 확실하게 정적들을 파괴했으며 마리우스의 처조카이자 킨나의 사위인 18세의 카이사르 역시 위기를 맞이했다가 술라의 측근들의 사면 요청으로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전기를 술라가 카이사르와 그의 처이자 킨나의 딸인 코르넬리아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또한 술라는 카이사르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
참고 자료
자유와 통일을 기키로 내건 1848년 3월 혁명이 보수적인 프로이센 융커들의 반대로 좌절되는 경험을 한 몸젠은 카이사르에게서 독일을 위한 강력한 지도자의 원형을 보았다.
김덕수, ?초기 경력을 통해서 본 포플라레스 지도자 카이사르?, 『호서사학 제41편』, 2005년 9월, pp.235-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