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서경천도운동과 묘청의난
- 최초 등록일
- 2002.09.23
- 최종 저작일
- 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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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열심히 하세용~~
목차
1. 왕기연장·천하제패의 기운이 서린 곳, 서경
2. 당시의 국내·외 정세
3. 서경천도 논의의 전개와 묘청의 난
4.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묘청 등은 당시 고려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 즉 개경 중심적인 정치권력의 집중과 이에 따른 지방 신진세력 진출의 좌절, 중앙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모순이 이자겸의 난을 통해 폭발되어 왕권 운영의 한계점을 노출시켰다는 점, 금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신하를 칭하면서 굴욕적인 사대를 행하여 자주적 국가로서의 위신이 실추되었다는 점, 집권세력의 토지 수탈 등으로 인한 농민사회의 피폐와 이를 바탕으로 한 귀족문화의 융성 등이 혼재하고 있었다. 묘청 등은 이러한 고려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그 계기를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찾았다. 나아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새로운 수도로의 천도를 주장 하였다.
그러나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세력은 천도운동의 좌절과 인종의 우유부단함에 매우 실망하였을 뿐 아니라 김부식·임원애 등 개경의 집권세력과의 갈등의 첨예화로 인하여 정치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이들은 일차적으로 이를 해결할 방도로 서경에서 거사를 일으키고 인종을 모시어 개혁을 진행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내분과 동료의 배신 등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묘청의 난과 그 실패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가?
첫 번째로는 지금까지 고려왕조의 양대 중심축 가운데 하나로의 역할을 해왔던 서경세력의 몰락이며 동시에 개경세력의 득세 및 김부식과 같은 경주계의 집권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고려의 위상 실추를 가속화시켰다는 점이다. 즉 자주적인 외교관계의 구현과 나아가 고려왕조의 진취성이 약화되면서 국내 정치에만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사 권12-고려왕조의 성립과 발전편, 258p~271p (국사편찬위원회 박영석저)
·동국통감 권3-인종편
·한국반란사, 57p~62p (큰바위사)
·모반의 역사, 96p~112p (한국역사연구회 한정수저)
·반역의 한국사 권1, 47p~75p (계백사 김현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