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와 척사
- 최초 등록일
- 2011.02.18
- 최종 저작일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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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와 척사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서론 - 19세기 조선사회의 분위기
본론
1. 척화사상
2. 동도서기론
3. 개화사상
결론 -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한 움직임
본문내용
17세기 중반에 우리나라에서는 청을 치자는 북벌론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점차 청조의 문화가 우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북학론으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북학에 서학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리 문제시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초반 노론 벽파에 의해 남인에 대한 정치적, 사상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서학은 그 존립기반을 상실해 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35년 무렵 이항로에 의해 척사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839년에는 이론적 정립이 이루어졌고, 후에 이항로의 제자들이 척사이론을 정비하여 나갔다.
당시 유학자들 중에는 서양 열강들의 문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병인양요,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등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서양의 종교, 문화의 전파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도 강하게 느끼면서 척사운동은 더욱 견고해져 갔다.
먼저 척화론이 강하게 대두되는 사건인 병인양요였다. 병인양요는 1866년 프랑스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7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을 공격한 사건이다. 강화읍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위협을 하면서 온갖 만행들을 저질렀고, 이에 조선 정부는 한성근과 양헌수 부대를 파견하여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각각 프랑스군을 물리치게 된다. 이 때 프랑스 군인들은 상당량의 금은과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서적들을 약탈해 갔다. 이에 호남의 유학자 기정진은 척사소를 올리고, 서양의 경제적 침략의 역사적 실체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안으로 국방력을 강화하여 조선의 문화를 지키면서, 서양의 경제적 침략을 막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경기도의 유학자 이항로는 서양물품이 백성의 일상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1866년 병인양요 때의 국론이 주전론과 강화론으로 양분이 되자 서양을 물리치자는 주전론을, 특히 주전론 가운데서도 서울을 지키면서 전쟁을 하자는 전수설을 지지하면서 국론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항로 기정진도 주전론에 동조하였고, 이는 흥선대원군의 해외통상 반대 정책을 강력하게 뒷받침하였다.
다음 1876년 초, 일본의 강요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은 개항에 직면하여 도끼를 메고 대궐에 나아가 척사소를 올려 일본과의 조약을 반대하였다. 최익현은 일본이 서양의 앞잡이로서 깊이 연계되어 있으며 일본인이 양복을 입고 서양 대포를 사용하고 서양 선박을 타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일본과 서양이 한통속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참고 자료
한국사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길잡이 하, 한국사연구회편, 지식산업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김한종 외 5명, 금성출판사
다시 찾는 우리역사, 한영우, 경세원
한국사 특강, 한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