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보수와 진보, 신정통주의의 등장
- 최초 등록일
- 2011.02.14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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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연세대학교 리포트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문제 발단의 시대적 상황
3.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사건
4. 한국 기독교 신정통주의의 등장
5. 나가는 말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초기 한국 기독교는 교리와 전래된 신학에 노예가 되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철저한 교리주의,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에 노예가 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교회 첫 희년예배에서 마페트 선교사는 조선교회 형제들에게 40년 전 선교사가 전한 복음 그대로를 전하라고 권고했고, 당시 한국 신학자 중 대표자의 하나였던 박형룡은, 내 신학은 따로 없고 남의 집 화원에서 꺾어온 꽃다발이라 하면서 선교사들의 신학을 정통신학이라 했다. 희년인 1934년에 한국 장로교총회는 창세기의 모세저작권을 부인한 김영주와 여권문제(고전 14:34)를 들고 나온 김춘배를 고소하고, 1935년 류형기의 아빙돈 단권주석의 번역진과 함께 이들을 처벌했다. 한국교회는 첫 희년에 해방과 자유의 역사 대신 정죄와 처단의 역사부터 했다.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의 싸움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루카스피셔, 주재용 옮김, 『새롭게 보는 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238-239.
이 글에서는 한국 기독교의 보수와 진보 사이에 갈등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사건’을 중심으로 그 갈등의 내용에 대해 먼저 살펴본 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의에 대해 한국 신학의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와 연관 지어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2. 문제 발단의 시대적 상황
1930년대 한국교회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대한 순응과 저항세력간의 갈등구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앙과 신학 노선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 갈등도 심각했으며 서북 지역과 서울 중부지역교회 지도자 사이의 지방색갈등도 심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