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10.12.22
- 최종 저작일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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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과 일본 양 측에서 바라본 독도의 역사에 대하여 구체적 사료와 여러 논문, 도서를 직접 보고 작성하였습니다.
목차
Ⅰ. 서 론
Ⅱ-ⅰ. 본 론
1. 신라
2. 고려
3. 조선 초기
4. 조선 후기
5. 대한제국의 울릉도와 독도 관리
Ⅱ-ⅱ. 본 론
1. 일본의 역사자료
2. 일본의 실효적 지배와 행정적 조치
3. 일본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 전개과정
4.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일본측 반론
5. 한국 입장에서 독도 영유권 주장 비판
Ⅲ. 결 론
본문내용
독도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옥저 條에서는 "나라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다가 비바람을 만나 수 십일을 가니 동쪽에 한 섬이 나타났다. 그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으나, 말은 서로 통할 수 없었다. 매양 7월이면 어린 소녀를 취하여 바다에 넣는 풍속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동쪽에 있는 하나의 섬이 바로 울릉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에는 울릉도에 자리하고 있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되어 해마다 토산물을 바쳐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사는 독도문제와 관련해 크게 주목이 되는 대목이다. 위에 따르면 우산국이 신라에 속하게 된 것은 신라 22대 지증왕 13년(512년) 6월의 일로,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州)인 이사부(異斯夫)가 등장한 후였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13년조와 열전 이사부조에 두 차례나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지증마립간) 13년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귀순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溟主:현재의 강릉)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그 섬의 크기는 사방 1백 리인데, 땅이 험준하여 그곳 사람들이 이를 믿고 신라에 복종하지 않았다. 지증왕은 이찬 이사부(異斯夫)를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州)로 삼아 우산국 사람들을 꾀로써 굴복시키도록 하였다. 이사부는 왕명을 받고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배에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밟아 죽이겠다`고 하니 우산국 사람들이 무서워서 곧 항복하였다.
또한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울릉도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아슬라주(阿瑟羅州) 동해중(東海中)에 순풍(順風) 이틀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羽陵이라고 쓴다]가 있으니 주위가 26,130보다. 도이(島夷)가 그 해수(海水)의 깊음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거늘 왕이 이찬 박이종(朴伊宗)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