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
- 최초 등록일
- 2010.12.07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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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
봉건제의 해체
자본주의
서양사의 이해
목차
목차
1. 농업에서의 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
(1) 프랑스 농업구조의 경우
(2) 영국 농업구조의 경우
2. 도시에서의 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
3. 나의 의견
본문내용
1. 농업에서의 봉건제의 해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
11세기 후반 중세 봉건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농업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첫째, 회전식 쟁기와 금속제 써레 등의 농기구 사용으로 인해 땅을 깊게 갈아 파종과 발육을 도와 수확량을 높여 주었다.
둘째, 밭갈이용 가축이 소에서 지구력과 속도가 월등한 말로 변하면서 농업 생산을 크게 증가시켰다. 또 말을 사용하면서 집까지의 이동시간이 줄어들면서 분산된 작은 촌락보다 큰 촌락을 형성하여 살수 있게 되었다.
셋째, 12세기 말경 삼포지제를 도입하였다. 삼포지제 도입 전에는 이포지제여서 농경지의 절반이 한해 동안 휴경지로 남아이었다. 하지만 삼포지제를 도입. 춘경지, 추경지, 휴경지로 나눔으로써 경지 이용률이 높아져 수입량이 높아졌다.
넷째, 중세 중반기 이 후 숲과 황무지 등을 개간하는 사업을 통한 대규모 경작지의 확대는 생산력을 더욱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생산력 증가를 가져왔고 이에 따른 인구증가로 인하여 촌락이 많이 구성되었다.
이때 새로운 토지에 이주할 농노를 확보하기 위하여 영주들은 개간 사업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일정한 특혜를 부여했는데, 이러한 특혜로 인하여 농노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 특혜 때문에 적지 않은 농노들이 이러한 새로운 개척지로 도주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이런 불법적 이동을 막기 위해 영주들은 남아 있는 농노에게도 많은 특혜를 주었다. 그래서 12,13세기에는 농노들의 부담도 줄고 더 나아가 농노 신분 자체의 해방까지도 나타나 농민의 자유가 더욱 신장되었다.
13~14세기 전환기쯤에는 개간 가능한 숲과 황무지가 바닥나자 인구에 비하여 토지의 부족이 점차 심화되어 갔으며, 지력의 쇠퇴 및 한계지의 증가에 따라 토지의 생산성도 낮아졌다. 그 결과 농민의 빈곤화, 한계지 포기에 따른 경작지의 축소, 기아와 질병에 의한 인구감소현상 등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봉건제 쇠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11~13세기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귀족들은 동양의 귀금속에 대한 소유욕이 높아졌다. 이러한 소유욕을 충당하기 위해선 생산성과 생산력이 같이 증가해야 하는데 인구에 비해 부족한 토지와 주종관계 하에 귀족의 가신 집단이 너무 비대하게 증가하는 바람에 생산성과 생산력이 정체해 버렸다. 그 결과, 노동 생산성이 정체하였다.
참고 자료
국회도서관 이진우,진일식 석사논문
최재현 유럽의 봉건제도
김진웅 손영호 정성화공저 서양사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