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초기의 정치와 호족
- 최초 등록일
- 2010.11.30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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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시대사수업 시간에 제출했던 리포트 입니다.
목차
1.머릿말
2.본문
⋅고려 태조왕건과 후삼국 통일
1)후삼국으로의 분열과 그 요인
2)고려 태조 왕건의 통일정책
3)후삼국 통일의 의의
⋅대호족 정책
1)호족에 대하여
2)대호족 정책
3.맺음말
본문내용
1.머릿말
‘고려시대’하면 정치, 사회. 문화에 따라 특징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일 듯 싶다. 혼란스러웠던 신라 말기에 독자적인 세력인 후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의 궁예가 나타나게 되고 후삼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고구려의 궁예는 점차 민심을 잃어갔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되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신라의 경순왕이 935년에 고려에 항복하고 후백제 또한 936년에 통일되면서 고려왕조가 성립이 되었다. 이 과정은 본문에서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 한다. 또한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과 함께 여러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 하나인 대호족 정책에 대해서도 알아보려고 한다.
2.본문
⋅고려 태조왕건과 후삼국 통일
1)후삼국으로의 분열과 그 요인
신라가 후기로 접어들면서 진골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극심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혜공왕대 대공의 난을 시작으로 권력 쟁탈전이 이어지기도 했다. 왕위 쟁탈전은 흥덕왕 말년에 극에 달했는데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벌어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신무왕이었다. 이후 잠시 평화가 오는 듯 했으나, 귀족들은 사치와 방탕에 물들었고 민중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민중들은 처음엔 집을 떠나 도망을 가거나 했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민중들이 여기저기에서 항거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진성여왕 3년부터 시작된 농민봉기였다. 그러나 관군은 오히려 농민들의 봉기를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남쪽에선 견훤이 후백제를, 북쪽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견훤이 처음 무진주를 점령하고 관직을 가지게 된 것이 진성여왕 6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것이 889년인 것처럼 되어있다. 아마도 무언가 착오를 일으킨 모양으로 892년설이 맞지 않나 한다. 견훤은 전주∙무주∙공주 등의 군사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은 묘하게도 옛 백제지역이었다. 따라서 견훤은 일찍부터 옛 백제지역 유민들의 동향을 알고 이들을 이용하고 했던 듯 하다. 견훤이 큰 저항없이 완산주에 무혈입성한 것도 이러한 옛 백제 지역의 민심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국호도 백제의 후예국이란 뜻에서 후백제라 하였다.
참고 자료
김갑동, 일지사, 고려전기 정치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