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전쟁
- 최초 등록일
- 2010.11.16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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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가 직접 쓴 것이므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한일의정서 이후의 의병전쟁입니다
목차
1.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의병의 재봉기(중기의병)
2. `을사오조약` 이후 의병봉기의 발전
2. 의병봉기의 전국적 확대(후기의병)
3. 의병의 독립군으로의 정비(전환기 의병)
4. 산발적 항쟁과 의열 투쟁적 활동(말기의병)
5.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1.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의병의 재봉기(중기의병)
1)`한일의정서`와 항일 의병의 재봉기
중기의병은 1094년 2월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고 체결한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한일의정서`의 핵심 내용은 일제가 대한제국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 있는 근거를 명문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제침략에 항거하여 다시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다.
(1) 함흥의 동학 의병 - 1904년 3월 경에 일어났다. 맹범영, 김응상, 정승조, 백락현, 임투연, 윤형천 등이었는데, 일제는 특히 윤형천을 중심인물로 파악하였다. 규모는 약 200여 명에 달하였고 3개 지역에 분산하여 거의를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야간 공격을 받아 봉기 직전 조직이 와해되었다.
함흥의 동학의병 봉기는 일제의 잔혹한 군사적 탄압으로 인해 초기에 좌절되었다. 이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경험에 비추어 일제의 눈에 장차 대한제국 침략에 있어 이들의 장애를 예상하고 잔혹한 탄압을 시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기간에 궤멸되었으나 이는 중기의병의 효시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2) 허위 명의의 의병봉기 - 1904년 5월5일(양력)자로 작성된 의병 촉구 격문이 13도에 발송되었는데 발송자는 허위, 이상천, 박규병, 김연식, 정훈모 등이었다. 그러나 일본공사관에서 미리 탐지하고 6월 25일자 공문으로 대한제국 공부에 항의하였다.
허위 명의의 의병봉기 촉구 격문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한일의정서`의 침략성을 논리적으로 간파한 점, 둘째 국제공법을 들어 일제의 침략성을 지적한 점, 셋째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의 침략성을 비판한 점이다. 이와 같은 선각적 인식은 당대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일제 침략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였던 측면을 감안하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