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 시의 당시풍
- 최초 등록일
- 2010.11.12
- 최종 저작일
- 2010.11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아계 이산해의 시가 가지는 당시풍에 대해 선행연구를 대략 살피고 구체적 작품 분석으로 실증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들어가며
2.이산해 시의 당시풍 양상
3.이산해 시의 한계
4.맺음말
본문내용
본고가 중요한 논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당시풍(唐詩風)이라는 측면이다. 이산해 이전시기 조선 시문단의 주경향은 송시(宋詩)였다. 그런데, 여말(麗末)부터 성행했던 송시풍의 사변적이고 기교적인 흐름이 중종 ․ 명종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의 조짐을 보이더니 선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당시풍이 문단의 주된 흐름이 되었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견한잡록』을 보면 이런 흐름을 잘 알 수 있는데, 이산해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엔 이런 분위기가 한창 확산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초년부터 당을 법 받았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 문단의 흐름에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났던가? 앞 시기 문단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해동강서파로 대변되는 정사룡(鄭士龍) ․ 노수신(盧守愼) ․ 황정욱(黃廷彧) 등이다. 임기(林芑)가 달아도 달아도 끝이 없는 용사 때문에 정사룡이 부탁한 시집의 주석을 포기한 일화에서 보듯 그들이 보여준 송시풍의 시들은 주지적이고 난삽한 용사로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다. 사림파들은 이런 점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온유돈후(溫柔敦厚)로 대표되는 내면화 경향을 띈 시들을 출현시켰다. 그리고 이런 내면주의적 정서표출의 제한은 필연적으로 서정성이 풍부한 당시풍의 출현으로 연결되었다. 억제되었던 감성적 욕구가 주정적이고 낭만적인 시풍으로 활짝 열린 것이다. 여기에는 “文必秦漢 詩必盛唐”을 주창했던 명대 전후칠자(前後七子)에 대한 국내의 관심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산해의 시는 바로 당시풍의 출현이라는 문단의 흐름 속에서 창작된 것이다. 그간의 이산해 문학관련 연구들은 당시풍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거나, 당시풍의 성격을 띈다는 간단한 언급만 한 채, 주로 유배 후의 의식 변화 과정에만 초점을 두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당시풍의 유행이라는 당대 문단의 변화를 빼놓고 이산해 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산해 시에서 형상화된 전란 체험이나 낭만적 취향이 담긴 시들을 당시풍이라는 바로미터 없이 그 값을 측정해 낼 수 있을까?
참고 자료
김수연, 「이산해와 유배문학」, 『한국문학연구』, Vol.27, 2004.
김지현, 「아계 이산해의 한시 연구」, 『인문사회과학논문집』 Vol.31,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