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벽화와 고구려 문화
- 최초 등록일
- 2010.10.05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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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선사문화 장지현 교수님 수업시간에 쓴 레포트입니다
좋은 곳에 쓰세요^^
목차
1. 고구려 고분벽화의개관
1)벽화고분의 출현
2)벽화고분의 구조
3)고분벽화의 제작방법
2.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개
1)고분벽화의 시대구분
2)고구려 고분벽화 전개과정
3.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구려 문화
본문내용
고구려 벽화의 기원과 개요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중국 요령성 환인지방(桓因地方)에서 나라를 세우고(북한은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에 건설되었다고 주장) 기원후 3년에는 압록강 중류지역인 만포진 건너 중국 길림성 집안 통구(通溝)평야의 국내성에 도읍했다. 그 후 주변국과의 수많은 전투를 통해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으며(남북국시대의 발해는 고구려보다 1.5∼2배 정도 넓었던 나라로 추정) 427년 장수왕 때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따라서 고구려 무덤은 중국 요령성 환인지방에 750여 기가 남아 있고 통구 지방에 1만2358기가 있다. 그리고 현재 발견된 벽화 고분은 약 80여 기로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안악(安岳)지방에서도 발굴된다. 고구려 벽화가 축조된 시기는 대부분 고구려가 절대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를 완비하고 한국사에서 가장 광대한 국토를 영위하며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중국과 교류하면서 불교를 비롯한 종교와 문화를 수입한 후 자신의 문화로 흡수시켰다. 그러한 긍지가 곳곳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고구려 벽화이다. 벽화고분의 그림은 현세적인 풍속화와 내세적인 상상화로 구분된다. 풍속화는 죽은 사람의 초상화는 물론 살아 있을 때의 생활 모습을 비롯하여 그가 살던 집이나 성곽 등 되도록 고인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것을 정성스럽게 그린 반면, 내세의 그림은 상상력의 산물로서 당시 믿음을 토대로 사신도, 신선도, 천상도 등 종교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풍속화는 대부분 4세기에서 6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나타난다. 이후부터는 풍속화와 사신도가 공존하는 벽화고분들이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사방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사신(四神)은 중국 고대 민간신앙에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개 5, 6세기로 추정되며 다실묘에서 단실묘로 변하는 과도기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이르면 고구려 고분은 단실묘가 대종을 이루며 고분벽화도 많은 변화를 보인다. 입구에는 현세적 그림을 그리고 고인의 관이 안치된 현실에는 내세적인 사신도만 그렸다. 후기의 고분벽화는 사신도로 통일된다. 천장에는 대체로 선인상(仙人像), 산악도(山岳圖) 등을 그렸는데 이는 고구려 말기에 유행한 도교와도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