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측천의 업적과 평가
- 최초 등록일
- 2010.10.05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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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측천의 업적과 평가에 대해 알아보자
목차
1. 무측천의 생애
2. 무측천의 정치 능력
3. 무측천에 대한 평가
1) 부정적 평가
2) 긍정적 평가
본문내용
1. 무측천(武則天)의 생애
성은 무(武), 이름은 조(照)이다. 624년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광원현(廣元縣)인 촉(蜀)의 이주(利州)에서 태어났다.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武士彠)은 635년 병사하였다. 태종(太宗)은 그에게 예부상서(禮部尙書)의 지위를 추증하였으나 귀족도 중신도 아니었던 무씨(武氏) 일족에 대한 은총은 더 이상 없었으며, 무사확의 유족(遺族)은 형주(荊州) 대도독(大都督)의 관저에서 퇴거하여 고향인 병주(幷州) 문수(文水)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무측천 및 그 언니와 여동생, 어머니 양씨(楊氏)는 이때부터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였다. 그러던 중 641년 무측천는 14살이 되던 해에 입궁하여 태종의 후궁인 재인(才人: 정5품)이 되었다. 재인의 지위는 비빈(妃嬪) 중에서 중하급이었고 그 직책은 비빈들의 침식과 야잠의 일을 기록하여 황제(皇帝)에게 그녀들의 일 년 동안의 수확 상황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태종은 후궁의 여인들보다는 황제위(皇帝位) 계승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장손황후(長孫皇后)가 낳은 적출의 황자는 상산왕(常山王) 승건(承乾), 복왕(僕王) 태(泰), 진왕(晉王) 치(治) 세 사람뿐이었다. 당연히 첫째왕자이자 황후(皇后)의 소생인 상산왕 승건이 태종의 즉위와 함께 태자(太子)로 책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상산왕 승건은 발에 생긴 질환이 심한데다 태자위(太子位)를 부황의 신임이 두터운 동생 복왕 태에게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에 기행을 일삼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약점을 이용한 대역 음모에 말려들었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일당은 처형되고 643년 4월, 상산왕 승건은 태자위를 박탈당해 서인으로 강등·유폐되었다.
이제 태종은 가장 총애하는 복왕 태를 태자로 세울 작정 있었다. 복왕 태를 태자로 세우는 데 대해 대부분의 중신들은 태종의 제안에 찬성했지만 한 사람 장손무기(長孫無忌)만은 그때까지 문제되지도 않았던 아홉째 황자인 진왕 치를 강력하게 추천하였다. 태종은 의외의 사태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형 상산왕 승건을 모함하기 위해 갖가지 책모를 꾸미고 있던 복왕 태의 추악한 면모도 알아버렸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