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튼-라이프니츠 비교
- 최초 등록일
- 2010.05.24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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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원래 수학을 포함한 과학에서 새로운 이론을 세우는 것을 새로운 이론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적분의 새로운 이론이 발견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발명”이라 일컬어 찬사를 보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미분적분학은 누가 “발명”하였을까?
그에 대한 답은 영국을 대표하는 뉴턴과 유럽 대륙을 대표하는 라이프니츠가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뉴턴과 라이프니츠 둘 다 미분을 발명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 미분을 둘러싼 우선권 분쟁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과학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적 재산권” 다툼인 미적분의 우선권 분쟁에 대해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분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뉴턴일까? 라이프니츠일까?
우리는 두 사람 모두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사실 미적분학 논쟁의 득실을 따진다면 라이프니츠는 잃었고 뉴턴은 얻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라이프니츠의 미분법이 유율법보다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유율에 대한 논문은 1820년경 이후 영국에서조차 골동품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발견의 정직한 독립성은 영국에서도 전혀 의심받지 않았다. 비록 뉴턴이 항상 유율의 우수성을 주장했지만, 새로운 극소량미적분학이 좀 더 실질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세기에 대륙 수학자들에 의한 미적분학의 발전이 없었다면 1699~1729년에 계속된 우선권 논쟁은 필요치 않았다.
뉴턴의 유율법의 발명은 역사적 사건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가 순수 수학자가 나이었다면, 그리고 극소량방법을 숙달하지 않았다면, 그는 “프린키피아”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수학에 적분학의 개념은 없었을 것이다. 순수 수학자였던 뉴턴은 응용수학에서 더 명성을 얻었다. “프린키피아”가 처음으로 출간된 1687년부터 뛰어난 이론적 개념을 가진 광학의 실험자로, 죽을 때까지 뉴턴은 유럽 전역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뉴턴의 빛과 색에 대한 이론을 받아들였던 유럽 대륙은 만유인력의 수학적 이론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극소량미분에서 그의 별견을 역사적 기념비처럼 기록했다. “프린키피아”로 인하여 뉴턴은 1699년 파리 학술원 외국회원이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뉴턴의 명성은 견실하게 커갔다. 철학자들의 분쟁에서 뉴턴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뉴턴의 입지는 점점 더 확고해지고 뉴턴의 이름은 프랑스 잡지에 폭넓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적분학 논쟁은 뉴턴의 업적이 완전히 새롭게 조명 받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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