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의 예학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0.03.29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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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7세기 조선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예학의 특징과 예송논쟁, 기호학파와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예학자 김장생과 정구의 예학사상을 서술한 글
목차
1. 예학(禮學)의 전개과정
2. 예학(禮學)의 수용과정
3. 예송논쟁(禮訟論爭)
4. 김장생의 예학사상
5. 정구의 예학 사상
본문내용
예학 논쟁은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이 죽자, 인조의 비(妃)인 자의대비(大懿大妃) 조씨(趙氏)가 몇 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비롯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효종이 집안(家統)에서 보면 둘째 아들이지만 나라(王統)에서보면 장자에 해당한다는데 있었다. 이에 남인 출신의 윤후와 허목 등은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적자의 예를 갖춰야 한다는 삼년복(三年服)설을 내세웠고, 서인 출신의 송시열과 송길준 등은 비록 왕통을 이었을망정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복설(朞年服說)을 내세웠다. 그리고 치열한 논쟁 끝에 결국 서인 계열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1차 예송) 그 뒤에 효종의 비(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인조의 비인 자의대비가 몇 년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 서인은 9개월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공복설(大功服說)을 주장하였고, 현종을 위시한 왕실측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복설을 주장하였다. 이 논쟁에서 결국 남인계열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송시열은 유배를 가는 일까지 벌어졌다.(2차 예송)
예란 가족 혈연적 요소와 사회 신분적 요소로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요소들이 충돌할 때는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서로간의 입장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희는 현열과 신분이 대립할 경우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으며 이것은 조선 주자학자들에게 남겨진 과제였다.
참고 자료
1. 이병도 著,『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
2.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7
3. 김승동 著,『한국철학사상』, 제일문화사, 1978
4. 조현규 지음,『한국의 윤리사상』중문, 2001
5. 황광욱, 정성식, 임선영 지음,『한권으로 읽는 한국철학』, 동녘,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