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군을 통해 본 조선 불교
- 최초 등록일
- 2009.12.28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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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불교의 호국적 성격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 머리말
Ⅰ. 승군의 기원과 전개과정
Ⅱ. 조선의 억불정책과 승려의 신분하락
Ⅲ. 임진왜란 시기의 승군 활동
ⅰ) 승군의 출현 배경
ⅱ) 승군의 성격
ⅲ) 승군의 활동양상
ⅳ) 승군에 대한 처우와 보상
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활동과 사상
Ⅳ. 승군 활동의 역사적 의의
▶ 맺음말
본문내용
Ⅰ. 승군의 기원과 전개과정
승군(僧軍) 혹은 승병(僧兵) 이들은 승려들로 조직된 군사들이나 병사를 말하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처럼 조직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 일종의 호국적 성격이 강한 의병부대라고 할 수 있기에 의승군 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러한 승군은 임진왜란 시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불교의 역사만큼이나 그 이전부터 비슷한 성격으로 존재해왔다. 승려들이 정식군인 으로 편성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별무반 조직에서부터 라고 볼 수 있는데 삼국시대의 불교수용을 거쳐 통일신라 때에도 국난 시에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서 승려들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전래된 불교를 법흥왕 14년에 공인한 이래 호국불교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하였는데 선덕여왕시기 자장으로 하여금 통일을 기원하는 황룡사 9층석탑 건립, 진덕여왕시기 혜량(惠亮)으로 하여금 팔관회를 개설하게 하여 위국충열(爲國忠烈)의 전몰장병을 위로했으며 진평왕시기 고구려가 자주 침범하여오므로 당시 불교계의 중진이었던 원광(圓光)으로 하여금 수(隋)나라에게 고구려 정벌을 간청하는 글을 짓도록 하였다. 이때 원광은
나 스스로 살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일은 승려로서 취할 바가 아니오나 소승은 대왕의 은혜로 이 나라에서 살고 있사오니 감히 거역하지를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했다. 또 그가 젊은이들에게
싸움터에서는 물러서지 말 것이며, 또 살생할 경우에는 가려서 하라.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는 세속오계를 가르쳤던 것도 신라사람 으로서의 생활신조와 국민윤리를 제시하려는 데 있었다. 태종 무열왕 때에도 신라의 조청성(현 옥천부근)이 강력한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으나 치열한 전쟁은 좀처럼 결단이 나지 않았다. 이 때 도옥은
▶ 맺음말
임진왜란 기 승군의 활동은 조선불교의 새로운 존립기반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명분에 입각한 당쟁을 일삼던 위정자들과는 달리 전통적 호국사상을 가장 잘 실현한 구국활동이었다. 본문에서 승군의 활동은 관에 의해 혹은 왕에 의한 타의적 모습이 부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비록 승려들이 당시에 사상적으로 사회적으로 도외시 되어왔지만 봉기한 승려들 스스로 개인의 사상이나 신념을 잠시 접어두고 국난 시의 국가를 위해 왕의 명을 받든 신하로서 혹은 民으로서 순순히 국가의 부름에 응한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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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동일 ≪한국사≫29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위와 동일 ≪한국사≫31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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