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정 영람루
- 최초 등록일
- 2009.12.19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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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누정에 대한 정의를 하고, 밀양 영남루에 대한 조사정리.
목차
1. 조선시대 밀양의 역사적 변천과정
(1) 연혁
(2)조선시대 밀양의 위치
2. 조선시대 누정의 설립과 역사적 의미
(1) 누정의 건립시기와 건립배경
(2) 누정의 건립주체
(3) 누정의 형태
(4) 누정의 기능
(5) 누정의 지역적 분포
3. 영남루
(1)영남루
(2)영남루의 제영시
(3)부속건물
4. 영남루가 가지는 지역적 · 역사적 의미
본문내용
2. 조선시대 누정의 설립과 역사적 의미
누정이란 누각과 정자의 약칭이다. 그러나 누각과 정자는 물론이고 제나 각, 그리고 대, 당, 헌, 정사까지를 합하여 통칭한 것으로 선비들이나 유한계급 그리고 관청이 설립하여 이용하였으며 경관이 좋은 곳에 주로 개인이나 동족집단 및 관아가 주체가 되어 설립되었다. 누와 정의 복합어인 누정은 단순히 건물의 명칭만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전통적 생활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산수자연을 사랑한 우리 선인들은 그의 인생철학과 결과물로 정자를 건립했고 공공물로 누각을 건립했다. 누정은 가족집단의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마을 속의 살림집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위주의 유람 내지 휴식공간 및 자신과 향리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특별히 세운 건물이다. 여기에는 원래 방이 없이 마루만이 있고, 사방이 두루 보이도록 막힘이 없이 탁 트이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건립된 것이 특색이다.
(1) 누정의 건립시기와 건립배경
정자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양반들이 한적한 곳에서 휴식하거나, 퇴관 후의 한가로움을 즐기기 위해 건립하는 것으로서 양반문화의 극성기인 조선 중기 무렵에 많이 건립되었다. 제 문헌에 나타난 정자에 대한 건립 기록은 대부분이 조선 중기 이후이며 특히 1880년대에서 1930년대에 다수의 정자가 건립되었다. 누정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 이때에 건립된 비율은 60~70%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이시기에 정자의 건립이 활발하였던 현상의 요인으로 첫째로는 이 시기의 외세의 침입, 그에 따른 가치관의 갈등 및 국내정세의 불안에 따라 많은 인사들이 은둔하거나 후진교육의 필요성 등을 인식한 것이 정자의 건립을 촉진시킨 요인의 하나이다. 둘째, 조선 중기 이후 첨예한 정권 다툼 속에서 밀려난 또는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많은 유학자 및 정치가들이 지방에 사림을 형성하여 지방문화를 주도하면서 부터이다. 사림에게 누정은 현실을 벗어나는 탈출구였으며 동시에 그들의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생존시에는 많은 문인들의 교류의 장소였고 이후에도 순례의 장소로서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