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종
- 최초 등록일
- 2009.11.09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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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홍만종 생애, 작품, 문학사적 의의
목차
1.생애
2.작품
1)순오지
2)명엽지해
3. 홍만종 문학 비평의 의의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생애
홍만종(1643-1725)은 豊山人으로 字는 于海, 號는 長洲, 玄黙子, 夢軒이다. 그의 曾祖는 洪鸞祥으로 兄인 履祥, 아우 鳳祥과 함께 顯達하여 文名을 떨쳤다. 祖父인 홍보는 仁祖 元年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 하였고 1627년 원주 목사로 있을 때 李仁居의 반란을 평정하여 豊寧府院君으로 봉해졌다.
그의 부친 柱世(1612-1661)는 165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兵曹正郞에 이르렀다. 榮州 郡守로 있다가 卒하였다. 모친은 吏曹參判 鄭廣慶의 딸이었다.
이러한 훌륭한 가문에 태어난 그가 능히 걸을 수 있는 입신 출세의 길을 버리고 운둔자적하며 丹學과 문학에 주력한 것부터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의 생애의 향방이 달라진 연유부터 살피고자 한다.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그의 병약한 몸이었다.
나이 20세에 미쳐 큰병을 만나 병석에 누워 있은 지가 몇 년을 넘겼어도 근해 정력이 아직도 완전한 사람이 못 되었다. 고서를 펴놓고 읽으면 불과 몇 줄도 내려가지 못하고 어질 어질 정신이 흐려지고 눈이 침침하여 이내 책 한 장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만두어 버렸다.
그가 20세 때라면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지 이태되는 해이다. 그의 부친은 金自點의 獄事에 연루되어 棄斥받아 영주 군수등 외직에 나가 있다가 세상을 떠났었다. 그의 身病에 관한 기록은 그의 글 여러 곳에서 散見되고 있다. 그러므로 홍만종이 단학수련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신의 병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실한 바람에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천성적으로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입신 양명의 길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道家의 양생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체적 병약과 함께 그의 생애에 영향을 준 것은 政爭이었다. 이른바 庚申大黜陟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 영의정 許積의 서자인 許堅과 친밀한 관계로 지녔기 때문에 許堅의 역모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당시의 사정을 조선왕조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諫院이 啓를 올려 말하기를 홍만종은 본래 경망하고 요상한 성격으로 오로지 간사하고 작은 소행을 일삼아 밤중에 분주히 다니며 종적을 감추니 청컨대 관적을 削去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참고 자료
남은경, 「<명엽지해>소재 풍자적 소화를 통해본 홍만종의 현실인식 양상」, 이화어문논집13(`94.2)
정용수, 「고금소총 명엽지해, 국학자료원」
조동일,「한국문학통사」제 3권, 지식산업사, 1994년
강전섭. 「홍만종연구」. 민속원. 1998년
http://cafe.naver.com/songdo2.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556